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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믹스커피 Jul 11. 2023

2화. 이제 사과박스를 벗어날래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27살의 겨울 즈음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연애를 끝내면서, 이제는 그냥 좋은 연애가 아니라 앞을 바라보는 연애로 바뀌는 시기구나 라는 걸 체감하는 시기였던 것 같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연인들을 뒤로하고, 같은 처지의 친구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봄날의 멀어진 기억처럼, 이상하게도 크리스마스만 되면 솔로가 되는 기막힌 운명을 같이 하는 친구. 그 친구의 자취방으로 우리만의 파티를 위해 치킨과 와인을 준비해서 갔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어렵기만 한 연애에 대한 신세한탄과,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의 이상형 월드컵 같은 시 더 분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비욘세 콘서트 실황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야, 이제 얘기해 봐. 왜 헤어졌냐?"

"나는 말이야, 지난 연애의 단점을 극복하며 늘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잖아? 그래서 연애를 하면 할수록 더 나한테 맞는 사람. 그리고 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이번에도 결국은 똑같아. 또 새로운 단점이 보이고, 그게 또 시들 해지고 그래. 이제 결혼을 생각할 나이인데, 그럼 결혼하면 계속 평생 봐야 되는데 평생 봐도 좋은 사람이랑 계속 사귀고 결혼해야 되는 거 아냐? 그런데 얘를 평생 좋아할 자신이 없어졌어. 나는 아무래도 결혼할 시기는 아닌가 봐."

"얘, 뭐라니. 늘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고? 늘 새롭지 않다고? 너는 맨날 똑같은 남자만 만났어. 내가 보기엔ㅎㅎㅎ 네가 만나는 남자들 프로필이 다 똑같아. 기억 안 나? '시 하나를 외우고 있는 흰 남방이 잘 어울리는 공대생'이 니 이상형이잖아. 소개팅으로만 만나고, 공대생에, 서늘한 성격에, 잘생겨야 되고. 늘 데리고 오는 애들마다 다 똑같았어. 똑같은 박스에서 똑같은 사람들끼리 비교해서 더 나은 사람 찾다가 안되면, 니 이상형을 바꿔야 되는 거 아니니?"


 크리스마스에 애인이 없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정말? 나는 정말 정말 지난 연애와 반대의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시작하는 건 마치 과일박스에서 과일을 골라서 먹는 것과 같았다. 모양이 똑같고 종류가 같더라도, 맛은 사람들마다 다르게 느끼는 것이 바로 과일이 아닐까. 나의 연애는 사과박스에서 사과를 꺼내서 그중에서 맛있는 걸 골랐다고 생각하고 먹었다. 그런데 사과박스에서 사과를 꺼내서 먹어보니 사과가 맛이 없으니, 그럼  다른 오렌지나 멜론을 먹어보자는 마음으로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었다. 그런데 내 모든 연애를 목격한 친구의 말은 정말 달랐다. 결국 나는 사과박스 안에서 같은 사과 중에 더 나은 사과를 고르고 있었고, 또 사과가 맛이 없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고른 게 오렌지나 멜론이 아니라 또 사과라고? 그럼 또 새로운 연애를 해도 이 사과도 맛이 없다고 사과 탓만 하고 있을 수 있겠구나.  


 전날의 크리스마스의 기분은 어디로 가고, 햇볕 가득한 아침에는 우리의 민낯처럼 현실이 마주하고 있었다. 과식한 다음날 축 쳐져있는 뱃살, 이제는 옛날 같지 않은 탱탱한 피부, 그리고 쌩쌩하지 못한 에너지까지. 마치 pc방에서 12시간 죽치고 나온 폐인들이 순댓국을 먹으러 나왔을 때 광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처럼, 자취방의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베개와 한 몸이 되어서 널브러진 친구와 내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27살의 크리스마스 다음날 아침이 30살에도, 40살에도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더 늙어가면서 말이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사과박스 안에서 사과만 찾고 있었다면, 사과 중에 최고의 사과를 고를 수 없었다면, 다른 과일박스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일어나. 나 사과박스에서 이제 벗어날래. 다 치우고 나가자 우리!"

 "얘 자다가 일어나서 갑자기 무슨 봉창뚜드리는 소리야. 뭐래 그냥 더 자자"

 "아니, 이렇게 있다가는 나 계속 사과박스 안에서 사과타령만 하다가 사과 다 썩겠어. 이제 오렌지박스도 찾고, 멜론박스도 찾을 거야. 내가 사과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더 좋아하는 과일이 있는 건지 찾아볼 거야. 일어나 어서 준비해. 이제 다른 박스에서 찾아볼 거야!"


 그렇게 나의 사과박스 연애이론은 27살의 연말과 함께 져물어갔다. 그리고 28살의 새해로 새로운 연애관으로 변모해 갔다.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뭐 내가 좋다고 하는 건 아니니, 누구랑 결혼할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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