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9
1.
돌아보니, 시작은 ‘동경’이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동경은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각각은 다음과 같다.
동경(憧憬)
(명)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함.
(명) 마음이 스스로 들떠서 안정되지 아니함.
나의 마음은 2번에서 1번으로 흘러갔다. 모든 마음을 빼앗겨, 내 힘으로는 그것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일을 할 때에도, 때로는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순간에도, 그래서 잠이 쏟아져서 더 이상은 눈꺼풀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때를 제외한 모든 시간에 내 마음은 그 곳에 가 있었다. 그 곳을 ‘음악’이라고 이야기해왔다.
유순한 성격 덕에 좋아라 했던 중학교 친구를 다시 만난 20살에 그 친구가 만든 노래를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그 위상이 갑자기 ‘동경의 대상’이 된 내 친구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한다는 것. 옷장 문을 여니 눈 밭의 세계에 도착한 [나니아의 옷장]의 한 장면처럼, 새로운 세계를 내게 보여줬다. 6년이 지난 지금의 언어로 돌아보면, ‘나의 감각, 나의 생각을 세상으로 꺼내는 일’을 처음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다.
친구가 알려준 단순한 코드 진행에, 처음 가사와 음을 적고, 목소리를 얹어보았다. 얼떨결에 완성했지만, 제법 마음에 들었다. 뜻은 알지 못하지만, 단지 발음하는 어감이 좋아서 외우게 된 어느 먼 외국의 단어 같았다. 서툴었고 이렇게 하는게 맞나 싶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동경의 대상에 가까워 지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그렇게 더듬더듬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후에, 이 맘 때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글을 찾았다. 마음에 드는 글을 처음 쓴 심경과 의미를 정리한,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의 일부이다.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마음에 드는 글을 쓰고 나면 그건 도무지 내가 쓴 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새로운 사람, 즉 신인이 되었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18p](18p)
나의 노래를 지인 여럿에게 불러가며 뿌듯해 하는 데에 멈추지 않고, 앨범을 발매하면서 신인(新人)이 되었음을 포고(布告)했다. 벌써 4년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꾸준히 노래를 내어 놓고 있다. 가끔 곡을 썼지만, 늘 쓰고있다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 왔다.
2.
영어에서는 명사에 ‘-(e)s’를 붙여 복수를 표현한다. (물론 많은 예외의 형태도 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기타 피크로 예를 들면, 하나가 있을 때는 ‘a pick’라 적는다. 하나 이상이 더해지면 더 이상 ‘pick’는 ‘-s’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내게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음악이 유일했다. 유일했기에 유일하다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각각의 예술 분야도 저마다의 한계가 있겠지만, 음악이 가진 표현의 한계가 있다. 미술에 비해 시각적 회화성이 떨어지고, 수필에 비해 세밀한 묘사에 한계가 있다. 시간 예술인 음악은 한번에 모든 표현을 제시할 수 없고, 시계열적으로 나열할 수밖에 없다. 특징이자, 장점도 한계가 될 수 있다.
이 때 문학을 만나게 되었다. 문학을 진지하게 접하게 되면서 글 속에서 만난 작가들은 놀라웠다. 그 중 한 분을 소개하자면, 김훈작가이다. 김훈작가를 통해서는 감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감각의 지경’이 넓어짐을 느꼈다. 수많은 예를 들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로 [라면을 끓이며]의 일부이다.
‘자두의 생김새는 천하의 모든 과일들 중에서 으뜸으로 에로틱하다. 자두는 요물단지로 생겼다. 자두는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적 에로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중략) 자두의 향기는 육향에 가깝다. 그 향기는 퍼지기보다는 찌른다. 자두를 손으로 만져보면, 그 감촉은 덜자란 동물의 살과 같다. 자두는 껍질을 깎을 필요도 없이 통째로 먹는다. 입을 크게 벌려서, 이걸 깨물어 먹으려면 늘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이 안쓰러움은 여름의 즐거움이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15, 368P]
충격이었다. 몇 입이면 씨를 보이며 잊혀질 자두 한 알을 이렇게 감각할 수 있다면, 하루를 살아도 그 하루는 며칠의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수 겹의 하루를 살아가는 분의 하루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의 유일한 표현의 언어는 음악이었다. 문학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게 한 동경이 나의 언어에 ‘-S’를 붙였다. 하나가 아닌 둘은, 공통점이라는 개념을 가능하게 한다. 둘 사이에는, 세상을 감각하여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좋은 노래를 카피해서 똑같이 연주하고 부르려 노력했듯, 작가들의 글을 필사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내 문장을 덧대어 보기도 했다. 그리곤, 내 생각을 글로 써보기 시작했다.
3.
‘나도 씁니다.’에서 ‘나는 씁니다.’로 제목을 고쳤다. 수개월 전부터 환야, 얼치기, 도겸과 함께 ‘우리도 씁니다.’를 기획했다. 서로의 글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다. 함께 시작은 했지만, 내겐 공백이 생겼다. 잘못된 습관으로 몸을 축내며 살아온 어제들의 결과였다. 두 달 정도 여러가지 전초 증상이 있었다. 몸살과 근육통, 한 밤중 찾아온 고열과 오한은, 온수 매트의 때이른 개시를 요구했다. 어느 날엔 결막염과 임파선염이 함께 찾아왔다. 그러다 눈두덩이에 수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상포진’이 시작되었다. 3부신경계의 말단을 태우며 온 몸을 제 멋대로 호령하던 바이러스는 왼쪽 얼굴과 두피, 눈을 집중적으로 괴롭혔다. 그 이후 두 달 동안의 외래진료를 통해 치료하고있다. 이제 2주정도분의 약이 남아있다. 조금 무리한 날이면, 여지없이 아리는 왼쪽 이마를 감각하며 무탈한 하루에 감사한다.
좋아하는 친구들의 글을 접하며 함께 시작하지 못한 미안함과 더불어 나도 어서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나도 씁니다’
‘나도 씁니다’와 ‘나는 씁니다’ 사이의 고민은 동태적, 정태적 설명 사이에서의 고민이었다. ‘나도 씁니다’는 나도 쓰고 있다는 상태에 집중하는 의미이고, ‘나는 씁니다.’는 내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다.
나의 쓰기는 수 년 전 나의 노래로 시작하였고, 짧은 글로 넓어졌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분투했던 시간들이 좋은 노래를 쓰는데 미약하게나마 살을 붙였다. 더불어 서면으로 만난 작가들을 통해 느리게 나마 그 표현의 밀도를 채워가고 있다. 나는 그렇게 쓰고 있다.
전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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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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