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놈은 하나에 꽂히면 화장실 가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싹 다 제쳐두고 미친 듯이 빠지지만 평소에는 산만하기 그지없다.
대학교 시절에도 과방에서 과제를 할 때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산책도 한 바퀴 돌고 오고,
책상 옆에 세워두었던 베이스 기타도 한번 튕겨보고,
친구들이랑 게임도 한판 하고 다시 책상에 앉는 식의 패턴이 반복되었다.
이건 과제를 하는 건지 하기 싫은걸 억지로 붙잡고 있으면서 틈틈이 노는 걸로 버티는 건지 모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도서관은 집중을 하기 좋은 공간일까?
그렇게 산만하다면 질 좋은 학습 환경을 위해 특화되어 있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면 되지 않았을까?
물론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도서관은 나에게 필요한 자료를 검색해서 대출하기 위한 장소였지 공부를 하기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다.
(공부와 집중을 다른 활동으로 본다면 도서관은 공부를 하기는 좋은 곳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몇 번 공부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아본 뒤에야 나의 공부 방식에 도서관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잔뜩 찾아온 책이며 자료들을 마음껏 펼쳐놓고 보기 위해 열람실 한 구석의 넓은 책상을 찾아다녀야 하는 불편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나치게 조용한 분위기가 나에게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내가 두들기는 노트북 키보드 소리가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집중보다는 긴장이 먼저 되었고, 집중을 하면 떨어대는 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것이 뻔했으며,
가끔 이어폰의 음악에 리듬을 맞춰 바닥을 굴려야 하는 발은 두 말할 것 없이 민폐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집중을 하는 와중에도 해야만 하는 놈이었다.
이어폰을 꽂고 작업을 하는 남자 @ 앤트러사이트 서교점
결국 나의 방식에는 맞지 않아서 도서관을 멀리하게 되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어렵고 힘든 연주법을 배워야만 하는 악기들처럼, 사람에게 편리하게 바뀌지 않은 모습의 도서관은 변명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도서관은 고전적인 공간인 것 같다.
정보와 지식을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 활자 정보인 책을 보관, 저장하는 메인 역할을 중심으로 마치 책이라는 것으로 함축된 지식을 숭배하듯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공간.
예배를 드리는 교회, 미사를 보고 있는 성당에 들어갔을 때의 고요함과 같이 마른기침소리도 한번 내기 부담스러울 정도의 분위기.
이런 도서관의 모습은 정작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등 책을 통한 추가 활동을 지원하는 데에는 보수적이라고 느껴진다.
마이크로 스페이스 : 집중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
이런 내가 집중을 하기 위해 나름 머리를 굴려서 조성하는 환경 조건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음악이다.
음악 중에서도 특히 가사의 빈도가 낮거나 거의 없고 반복적인 비트와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는 음악.
그렇다 주로 전자 음악이다.(DJ를 꼭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이때부터였다.)
평소에 다양한 음악을 즐겨 듣고 좋아했기 때문에 다른 음악들도 많이 들으면서 작업을 했지만 집중을 해야 할 때면 다양한 종류의 일렉트로닉 음악을 플레이 리스트에 장전했다.
직접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엠씨스퀘어라는 추억의 아이템이 한 때 입시생들에게 유행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반복적인 소리를 재생하여 집중력을 향상해주고 수면이나 휴식의 질을 높여주는 기기로 유명했었다.
내가 즐겨 듣던 전자 음악의 반복적인 멜로디와 비트가 엠씨스퀘어와 같은 맥락에서 집중력 향상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추억의 엠씨스퀘어 @ 응답하라 1994 (참고로 필자는 절대 직접 사용을 했던적은 없다. 보다 더 아재 세대가 주로 사용했었음)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편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단단하고 심플한 의자에 앉아 플레이 리스트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음악을 플레이하면서 공부를 시작한다.
초반에는 플레이되는 음악을 따라 부르기도 하고 흥얼거리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틀어 놓았던 음악이 인식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때가 바로 집중을 하고 있는 순간인 것이다.
경마장에서 질주하는 경주마가 주변의 산만한 환경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달리는 것에만 집중을 할 수 있도록 눈가리개를 하듯이, 민감한 청각을 무뎌지게 만들어 집중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곳은 서울의 한 병원 응급실의 침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응급실의 침대를 책상 삼아 노트북을 펼쳐놓고 간이의자에 앉아 글을 적고 있다.
물론 귀에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꽂고 있다.
언제 어떤 장소에서나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
마이크로 스페이스.
(물리적인 요소가 아닌 청각 시각 등의 감각을 통제하여 하나의 행동, 행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방식이나 장치)
VR 기술이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 제한된 정보를 전달하여 마치 실재와는 전혀 다른 가상의 공간을 경험할 수 있게 하듯이 집중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책상과 의자가 잘 갖춰진 공간이 아니라 가장 최소한의 단위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차단할 수 있는 나만의 작고 효율적인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