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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Dec 20. 2023

사주는 알고 있다. 왜 내가 엄마와 닮았는지?

인복이 없는 엄마 그래도 괜찮아.

엄마처럼 살기 싫었는데

엄마처럼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녀와 내 사주의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임수 일간으로 태어났다.




아마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거 같다.

아버지가 제주도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봉투가 들려있었고

그 봉투에서 파인애플을 두 개를 꺼내 보여줬다.




평소 음식 같은 것을 사들고

퇴근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는데

막둥이 아들을 먹일 생각이었는지

갑지가 귀한 열대과일이 짜잔 등장하게 되었다.

80년대 그 시절엔 파인애플을 가게에서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겉은 울퉁불퉁 까슬하게 생겼지만 속을 잘라내면 달달하고 시큼한 파인애플 향이 퍼져서 후각 기능이 살아있음을 알려줄 것이다.



한 입 베어 물면 우리들을 열대 밀림 속으로 데려다줄 거 같은 공간이동 마술을 펼칠 파인애플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와 동생들은 와우 박수를 치고 점프를 하면서 신나 환호했다.



우리는 모두 파인애플이 칼로 잘려서 껍질을 벗기고 안에 노오란 속살을 한 입 크기로 잘려서 바로 입으로 직행하기를 바라며 그 파인애플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와, 파인애플 너무 맛있겠다."

"엄마, 빨리빨리 잘라줘, 어서 먹자."



우리들은 기대 만땅으로

엄마의 손을 지켜보는데

엄마는 파인애플을 자르지도 않고

그대로 봉투에 다시 집어넣는 거 아닌가?




"이런 귀한 과일은 이웃들이랑 나눠먹어야 해."




우리들의 표정은 실망 그 자체로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신나는 천국에서 실망의 지옥으로 떨어졌다.



파인애플 이용 권한을 가진 그녀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파인애플을 눈앞에서 목격했지만 그날은 아무도 파인애플을 먹지 못한 채 잠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다녀온 사이 파인애플 안부를 물으니 엄마의 손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결국 나는 파인애플을 먹지 못했다.

상상 속 파인애플은 너무 기대되는 맛이지만

현실에 파인애플은 아무런 맛이 없었다.




엄마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녀가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은 높이 칭송받을 일이다.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시스템이 작동하니 곳이니

어쨌든 좀 베풀었으니 힘들 때 도움을 받으면 된다.




엄마가 해준 만큼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어느 정도 돌아오는 게 인지상정인데 희한하게 엄마가 그렇게 퍼주었는데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아프거나 어떤 도움을 받을 일이 생겨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냥 엄마 혼자서 해결해버린다.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입원을 했을 때에도

몸이 다 회복이 되어 퇴원할 즘에서야 알려줬다.

심지어 딸에게도 이렇게 이야기를 안 해주는데

친척이나 지인들에게 말이나 했겠는가.



그녀가 몸이 아파서 수술을 했을 때에도

퇴원하고 나서 한 달이 지난 후

몸이 어느 정도 추슬러질 때쯤 알려준다.




그녀가 수술을 했는지 아버지가 입원을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안 좋은 소식은 알려주지 않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사기를 당한 것도 몇 년이 지난 후에나 알았다. 이미 손을 쓸 방법을 찾을 수 없을 상태가 되었을 때에나 알려준다.




자식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싶고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너무 잘 알겠는데 그러면 그동안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신경 쓰고 챙겨줬는가.



타인들은 그녀를 도와주려고 해도 도와줄 수도 없다. 모든 정보를 차단을 시켜버리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잘 지내는 줄로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설사 누군가가 눈치를 채고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사코 괜찮다고 밀쳐내고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주려는 사람도 왜 저러나 싶어 지쳐서 떨어져 나가버린다. 결국 여러 사람들에게 지원을 해줬지만 정작 그녀는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런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랐다.

난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소름 끼치게도 내가 너무 닮았다.




그녀와 똑같이 내가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어느새 착한 여자 콤플렉스와 인정 중독이 합쳐져서 나도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인정을 갈구했다.




누가 도와달라고 안 해도 먼저 신경 써주고 챙겨주면서 잘해줬다. 그것은 나를 좋은 사람으로 인정해달라는 신호를 보낸 거였다.




엄마처럼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데 정작 받는 것은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나도 내 일은 혼자서 끙끙대면서 해결했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가 힘든 일을 말하지 않으니

도움을 줄 사람이 당연하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간혹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1개를 주고 3개를 뺏어가려는 유형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남을 챙기는 것에 더 우선이라

나를 챙기지 못하고 방치했다.




엄마를 닮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비슷하게 살아왔다.






사주를 공부하니

엄마와 내가 닮은 이유를 찾았다.




수니 사주




임수 일간에 갑목은?




임수 일간에 갑목이 있다면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말한다.



그래서 그런가 친정에서 맏딸로 어떤 의무감에 눌려있었다. 또 결혼을 한 후에도 가장으로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남편이 신혼여행 다녀온 지 한 달 만에 퇴사했고 호주로 이민 오기 전까지 외벌이를 생활을 했다.



임수에게 갑목은 계획적으로 누군가 접근해서 뺏어 먹고 도망갔다는 뜻이다.



허점을 흘리고 다니니 계획적으로 접근하고 나에게서 필요한 것을 가져가고 튀는 놈들이 있었다. 주변에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잘 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게다가 인성이 없다 보니 사람에 대한 속마음 파악이 너무 부족해서 더 그런 상황을 눈치 재지 못했다.





임수 일간에 을목은?


임수 일간에 을목이 있다면 덧없음을 느낀다고 한다. 의미 없음. 손에 잡히지 않음. 의지하였으나 의지가 되지 않는다. 삶의 허무함을 느낀다. 공을 들였는데 날아가 버렸다. 열심히 사람을 키웠는데 떠나가 버렸다. 누군가 찾아와서 나에게 기대치를 올려주고 그냥 도망갔다는 뜻이다.



관계가 끊어진 지난 인간관계를 살펴보면 이런 공허함을 많이 느꼈다. 내가 자초한 것임을, 내 팔자가 그런 것임을 알고 굉장히 우울했다. 안 해도 될 짓을 많이 했던 것이다. 나한테 잘해주지 않을 엉뚱한 사람에게 과한 친절을 베푸는 어리석음을 가졌다. 그로 인해 삶의 허무함을 체득한 것이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임수 일간에 갑목과 을목이 있다면?



임수 일간이
갑목에 을목까지 있다고?
그렇다면 도와주고 욕먹었네.

선운 사주



내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도와주고 욕먹었다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좋은 마음으로 시간과 돈을 들여서 착한 손길을 보태어줬는데 결과는 욕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더는 버틸 수 없어서 분노가 폭발하고 관계들이 파탄 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을 보는 눈이 없다.

선운 사주




남편이 나한테 자주 했던 말이 바로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그런데 이 말을 인정하기까지도 거의 2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시간이 흘러 결국 몸과 마음에 상처로 너덜하게 찢어진다. 또 억울함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제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연민이 지나쳐서
뭔가 불쌍한 사람, 
힘든 사람 못 지나쳐서
물심양면으로 돌봐줬더니
알고 고니 안 불쌍한 놈이었다.
그냥 불쌍한 척을 한 놈이었다.

선운 사주



자연스럽게 케어해주고 싶은 마음에 도와줬지만 알고 보니 내가 더 불쌍한 놈이었다는 것을 한참 지나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친정엄마 사주





임수 일간에 정화가 있다면?



임수 일간에 정화가 있으면 타인에게 아무리 주고 아무리 베풀어도 상대들은 만족하지 못하더라.




물상으로 해석하면 정화라는 열을 가해서 임수라는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모습이다. 임수 일간이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는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으로 비유할 수 있다.




친정엄마는 임수 일간에 정화가 있어서 그런가 희생정신이 남들보다 투철하시다. 그런데 남들에게 해준 것에 비해서 돌아오는 것이 없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비해서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그런 친정엄마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옆에서 많이 챙겨준다고 했는데 이젠 나도 지쳐버렸다. 내 생각에는 나처럼 잘해주는 자식에게 그래도 정을 주고 그 마음을 알아줘야 하는데 그렇게 않았다. 오히려 더 희생을 강요하는 자식들 편에서 그들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는 삶을 선택하셨다.




그런 면이 너무 서운했는데

엄마의 사주를 들여다보니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가슴이 아려온다.




엄마의 모습에서

내 안에 내가 너무나도 보여서

나를 눈물 나게 만든다.





친정엄마가 인복이 없는 이유?




친정 엄마는 성격상 남한테 신세 지는 거, 부탁하는 거, 귀찮게 구는 거를 엄청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본인은 남한테 엄청 희생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자신의 희생을 절대 표시 안 나게 한다. 



그것을 표시나 게 하는 건 소인배들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있으면 저절로 남들과 하나님이 알아준다고 생각하신다. 물론 알아주긴 하지만 그것은 잠깐 알아주는 것이고, 그 잠깐 알아주는 것을 위해서 그렇게 평생을 희생하며 살아오셨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 것 그냥 전화해서 물어보거나 부탁하거나 잠깐 빌리면 되는건데 그것을 절대 안 하신다. 결국 일을 엄청 크게 만들고 본인은 더 힘들어지고 나중에 시간 지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린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타박을 듣기 일쑤이다. 그러니 다음에 더 알리지 않는다. 그래서 기회가 와도 잡지를 못한다.



충분히 부탁해도 될 사항인데, 그냥 가서 굽히고 부탁하면 되는데 부탁을 안 한다.



본인은 남의 행사,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행사까지 모두 찾아가 부조하면서, 정작 우리 집에서 일어난 커다란 일, 입원 한 일, 삼촌상 같은 걸 알리지 않는다. 알리면 충분히 다 찾아오는데도 명절에 사람들 모여있어도 말을 안 한다.



남한테 신세 지는 걸 어려워 말아야

인복도 있는 것인데...



나처럼 엄청 베풀었는데 인복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성격이

너무 깔끔하고

정의롭고

그릇이 크면

인복 없는 것 같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괜히 이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바로 인간의 심리를 잘 표현한 말이 아닌가 싶다.



이런 친정엄마를 닮아서 나도 인복이 없는 행위를 했던 것이다.

물론 타고난 사주팔자도 한몫했을 것이다.




엄마와 나의 닮은 점을 적으면서

과거의 내 행동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가장 엄마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보다도 엄마를 닮은 사람이기에....

엄마의 말 못 할 속상함이 너무 확 와닿는다.




조금이라도 어리석음을 밝힌

내가 먼저 엄마를 용서해야 하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다.




그동안 나처럼 엄마도

너무 힘들게 살아오신 것이다.

이제서야 속죄의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인덕이 없어도 괜찮아.

적어도 그 병든 속마음을 이해하는

딸이 여기 있잖아.

엄마 미안해.

이제서야 알게 되어서  너무 미안해.




엄마의 손을 다시 잡게 된다면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한 십분을 쏟아내야만

그다음에 안부를 물을 수 있을 거 같다.




사주 공부 덕분에

외로운 보살 친정엄마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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