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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Feb 16. 2022

좋은 책을 만들고 있다

사무실로 24인치 모니터가 배달됐다. 원래도 조금  모니터를 쓰고 있었는데 모니터  대를 연결하니 책상이  찼다. 대표님은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필요한  있으면 뭐든지 말하라고, 책을 만드는  돈을 아끼진 않겠다고. 실무자 입장에서 너무나 든든한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표님의 말을 믿고 회사에 충성을 다하기에는 내가 너무  묻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신기하게도 내가 거쳐온 회사의 대표님들은 하나같이 ‘일할  돈을 아끼지 말라 말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애써 감사하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양옆으로 길게 늘이게 된다.


몇 달 전부터 기획하던 책에 일러스트가 필요했다. 타깃 독자나 도서 콘셉트를 고려했을 때 일러스트를 넣으면 더 반응이 좋을 것 같았다. 일러스트가 필요한 이유를 보고서로 정리해서 올렸지만 반려당했다. 회사에서 처음 시도하는 방향이고, 매출이 잘 나올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일러스트를 넣는 건 위험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우선은 무료 이미지를 최대한 괜찮은 것으로 넣어 보기로 합의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미지를 전부 빼고 글로만 페이지를 채우고 싶었다. 그렇다고 정말로 이미지를 모두 빼 버리기엔 내용이 빈약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꾸역꾸역 무료 이미지 사이트를 뒤져 이미지를 채워 넣었다. 물론 예쁜 일러스트를 쓴다고 책이 무조건 잘 팔릴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소비자일 때의 나를 생각해 보면 내용을 떠나 조금이라도 눈길을 끄는 책에 손이 가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기획 회의를 하면서 새로 입사한 직원 앞에서 대표님이 한 번 더 ‘엄포’를 놓았다. 더 좋은 퀄리티의 책을 만들려면 일러스트에 돈을 써도 된다고. 회의 내내 다이어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는데, 대표님의 말에 절로 고개를 들게 됐다. 이어서 대표님은, 일러스트에 돈을 쓰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처음부터 우긴다고 들어줄 수는 없다고 했다. 납득이 가는 이유를 들면 언제든지 투자할 의향이 있다며 껄껄 웃었다. 거기까지 듣고 다시 다이어리로 눈을 돌렸다. 어차피 일개 사원인 내가 이러쿵저러쿵 토를 단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까.


이번 회사에서는 출판사치고는 꽤 좋아 보이는 약간의 복지, 새 의자, 새 모니터, 새 다이어리 등 많은 것을 받았다. 심지어 대표님은 점심 때마다 직원들이 비싸고 맛있는 밥을 먹지 않는 게 불만이라고 한다. 가끔 따로 대화할 일이 있을 때마다 요즘 일은 어떤지, 점심은 잘 챙겨 먹는지, 회사에서 불편한 점은 없는지 등 질문 세례를 받는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자 회사에서는 검사 키트도 왕창 사서 필요할 때마다 쓰라고 한다. 심지어 생일인 사람이 있으면 케익을 사서 파티도 한다. 이렇게나 직원을 생각하는 회사가 또 있을까.




스마트 티브이 기능이 있는 24인치 모니터에 기획서와 원고를 띄워놓는다. 수정을 요청한 원고는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수정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출간 일정을 확정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원고를 편집하고 디자인을 얹을 시간이 촉박했다. 작가는 아니지만, 편집자로 내 이름을 걸고 나가는 책인데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은 욕심이 자꾸 차오른다. 작가가 부족하게 써 온 원고는 내가 채워 넣을 수 있다. 내 글이 아니라 함부로 수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편집자님 마음대로 수정하셔도 된다’고 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 일단 글을 쓰고, 저작권자인 작가님에게 ‘확인’만 받으면 출간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디자인은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디자이너에게 ‘예쁘게 해 주세요.’라고 한다고 해서 디자이너가 도깨비 방망이로 뚝딱 책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니까. ‘예쁘게’ 세 글자를 쪽글 하나 정도의 분량으로 설명해야 ‘팔아먹을 수 있는’ 디자인을 받아 볼 수 있다. 24인치 스마트 티브이 기능이 있는 모니터로 보면 원고의 부족한 부분이 더 잘 보이는 기분이다. 여기를 더 채우고, 여기는 좀 빼고, 여긴 이렇게 바꾸고 싶어진다.


경주마처럼 양옆의 시야를 차단하고 오로지 더 높은 매출을 위해 달린다. 할 수만 있다면 거리에 나가 호객행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게 제가 만든 책인데요, 내용도 알차고 책꽂이에 꽂으면 인테리어로도 최고예요.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디자인도 자신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자신감은 자꾸 썩은 동앗줄처럼 삭고, 끊어지고, 결국엔 땅에 떨어진다. 원고가 부족하고 디자인이 안 예뻐서가 아니다. 두 손을 다 써서 공수를 들이고 싶은데, 한 손만 서서 두 손으로 만든 것 같은 결과물을 뽑아내야 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새 의자에 앉아 갓 설치된 따끈한 모니터를 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엑셀에는 업무 일정을 빼곡하게 적어둔다. 다이어리에도 회의 내용, 기획 아이디어, 의미 없는 낙서가 늘어간다. 회사에 바라는 게 없는 나는 자꾸 회사에 무언가를 바라는 척하며 많은 것을 요청한다. 회사는 개인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고 하면서 작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회의실 한귀퉁이 구석진 곳으로 사람을 밀어낸다.




누구나 자기의 방식이 있다. 한 집단을 이끄는 사람은 나름의 방식으로 방향을 설정한다.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훈수를 둔다고 한들 키를 잡은 사람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키잡이가 가려는 방향이 싫다면 내리면 되지만, 이미 배를 타고 멀리 나온 터라 바다 한가운데에서 혼자 내리려면 굳은 결심이 필요하다. 배 밖으로 보이는 바닷물은 너무 짙고, 깊어서 감히 뛰어내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일을 할 때는 손을 아끼고 싶지 않다. 한 번이라도 더 손을 탄 종이 뭉치를 보여 주고 싶다고 하면 지나친 욕심일까. 좋은 책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쩌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보다도 짧은 시간에 최고가로 치고 빠지는 게 좋은 책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만드는 건 '읽기 좋은 글'이 아니라 '잘 팔리는 책'이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글을 읽고 쓰는 게 좋은데 창작할 실력은 부족한 내가 선택한 길이 편집자라는 점이다. 내가 쓴 글도 아닌데 편집에 관여했다는 것만으로도 혼자 뿌듯해하는 게 조금 우스울지도 모른다.


일련의 과정이 억울하면 내가 직접 배를 띄우고 키를 잡으면 된다. 배를 장만할 여력이 없고, 키를 잡을 용기가 없으니 갑판에 서서 바닷바람을 맞는 게 최선이다. 어쩌면 일하면서 열정을 너무 태우는 바람에 모든 게 다 타버린 것은 아닌지. 여전히 나는 능력에 비해 욕심이 과하다. 능력이 부족한 것을 감추고 싶어서 회사와 원고를 탓해 본다. 직원을 생각하는 회사 덕분에 편안히 앉아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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