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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이 Sep 13. 2024

P의 이름, 서현진


전편인 '달콤한 거짓말'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간혹 솔직함을 가장한 채 부끄러움을 내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강요된 언급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가 그녀를 만나기 시작한 건 청도의 그때부터 오래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웃음 뒤에 숨겨진 것이 두려움이었을까? 알고 싶다 가도, 모르고 싶다.



수많은 거울들. 수북이 쌓인 기억의 저고리들. 나는 그중 하나의 옷고름을 조용히 풀어헤친다. 풍만한 골짜기, 그 살내음에 흠뻑 취하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란 환상에 취한다.



아니다, 환영에 찌든 마음일 뿐이다. 청도의 그 밤도 그랬다.



현진, 서현진.



그녀의 이름 석자를 되뇐다. 어쩌면, 그 이름 속에 파헤쳐질 무언가가 두려운 걸지도 모른다. 이 느낌을 부끄러움이라 말하기엔 너무 단순하다.



"혁규야, 마시다 말고 뭘 그렇게 멍 때리니?"



아, 난 무엇을 마셨던가. 그것은 고문의 잔이었다. 형틀에 떨어진 피로 채워진 잔.



나보다 나이가 든 여자에겐 나만큼의 욕망이 있을 줄 알았다. 유치한 어린 여자들과는 다른, 농염하게 흐르는 욕구가 말이다. 현진의 부드럽고도 달콤한 목소리에 나는 고문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현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의 두 눈 속에 잠시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가까운 듯 아득히 멀었다. 아득한 고요 속, 무언가가 소리 없이 부서지고 있음을 난 느꼈다.



“너야 말로. 무슨 생각했는데?”

“너라니, 권혁규. 누나한테 계속 반말할 거니?”



현진의 가벼운 웃음소리에 나도 함께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 숨겨진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사이가 뭐지? 이 관계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우리 사이를 뭐라고 생각해?” 나는 대놓고 물었다.


“…”



현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 역시 답을 알고 싶으면서도 두려웠다.

혹시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닐까 봐.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현진은 잔을 들어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그래, 역시 그렇겠지.



“너는?”



되묻는 현진에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잔을 들고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솔직해질 용기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지금 말해버리면 더 이상은 돌아갈 수 없을까 봐? 그 대답은 나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거짓말 같기도 하고 현실 같기도 하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띠리링, 띠리링…”


“아, 남편 전화다. 받고 올게.”



그녀는 바깥으로 나가 통화하기 시작했고, 나는 잠시 혼자 남았다.

현진, 서현진. 다시 그 이름을 되뇐다. 괴롭다.

남편… 남편이라. 누가 내 귓불을 잡아당기면서 외치는 것 같다. 제발 그만두라고, 여기서 멈추라고. 현진의 휴대전화에 뜬 남편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울리며 내 온몸을 찌르는 것 같다. 잔 속에 남은 맥주처럼, 마음 한 구석에 씁쓸함이 차오른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현진의 목소리, 그 가벼운 듯하면서도 농염한 입 꼬리, 그 입꼬리 뒤에 숨겨진 미묘한 감정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나는 그녀에게 끌리면서도 동시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아니, 사실 나는 가고 싶지 않다. 부끄럽다. 남부끄러운 일이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부끄럽다.



현진이 다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눈은 내 눈과 마주치자마자 살며시 웃는다. 마치 곧 피어날 수국처럼 화사하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다. 남편과의 대화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와의 관계는 나와 다른 색깔일까? 그와는 밤은 어떨까? 달뜬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아랫도리가 묵직해진다.



괴롭다.



“벌써 취했어? 얼굴이 엄청 빨개졌네?”

“아니야, 멀쩡해.”



멀쩡해지고 싶었다. 정말.



“무슨 일 있어?” 내가 물었다.


“아니, 별거 아니야. 그저 집에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전화했나 봐.”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그녀의 말이 내게는 지나치게 가볍게 들렸다. 그 가벼움 속에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나는 다시 잔을 들었지만, 맥주는 더 이상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무거운 마음 때문인지, 아랫도리가 묵직해져서인지, 더는 이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우리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대화가 멈춘 순간에도 그녀의 존재가 내게 압박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웃음이, 그녀의 침묵이, 심지어 남편의 전화까지, 모든 것이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제 집에 가야겠지?” 그녀가 말했다.

“너도 그만 일어나야 할 거 같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제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무언가가 나를 잡고 있었다.

어쩌면, 아니, 이 관계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맞다. 그것이 부끄럽지 않은 유일한 선택일 것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토막 소설만 쓰다 보니, 이어지는 구상은 없었는데요. 바람 소설가님께서 다음 편이 궁금하다고 해주셔서, 용기를 내어 이어서 써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람 소설가님!


모두들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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