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엔 달걀을 넣어야 제맛인데 달걀이 없어. 그러면 먹기 싫어질 밖에요.”
“그건 아니죠. 달걀은 라면 맛을 해치는 존재에요. 달걀 넣으면 라면은 순수하지 않아요.”
중늙은이 네 사람, 그러니까, 남자 셋, 여자 하나가 모여 소고기를 구워 먹다가 뜻밖에 라면이 소재로 불리어 나왔다. 라면이 이야기의 메인 디쉬가 돼 버렸다. 비싼 소고기 먹으면서 왠 라면인가 싶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라면을 소고기보다 더 자주 먹는 사실은 왠만하면 고개 끄덕일 현실이다.
서로를 안지 2년 여 된 남자 셋 중 한 남자가 다른 남자 둘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고 여자 하나는 끌려 나갔다. 좋은 사람들이고 배울 것 많으니 함께 하자는 제안이었다. 첫 만남에 고기 구워 먹는 일이 껄끄럽긴 했지만 이 나이에 그런 거 가리는 일도 우스워서 그러자고 했다.
고기 종류 선택에서 약간의 고민이 있었다. 초대한 남자는 고기파다. 다른 음식 아무리 잘 먹어도 주기적으로 소고기 내지 구운 돼지고기라도 먹어줘야 허전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 두 사람과 1년여 넘게 어울렸다. 이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고기를 대접하고 싶을 정도의 마음을 낼 시기라고 판단했다. 여자 하나는 그들이 혹시 소고기를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절대로 소고기를 싫어할 수 없다는 요상한(?)확신이 있었던 남자였다.
소값이 떨어져서 축산업자들이 울상이라는 뉴스는 들었지만 설마 했던 남자는 주촌까지 가서 맛난 한우를 샀다. 그리고 모 마트 2층에서 마트에서 산, 약간 덜 믿음직한 소고기와 함께 구워 먹기로 계획을 세웠다. 굽는 도구와 밑반찬 정도에 대한 비용만 지불하고 식사나 술은 자유롭게 주문하면 되었다. 고기는 굳이 그곳에서 사지 않아도 되었다.
소고기는 씹기도 전에 살살 녹았다. 팔린 곳의 명예를 걸고 맛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 사온 고기라고 눈치 먹지도 않았다. 문제는 두 남자가 소고기를 예상보다 많이 못 먹는 데서 발생했다. 맛만 있으면 좋아할 거라고 여긴 남자가 당황했다. 소고기를 굽는 속도를 먹는 속도가 따라잡지 못했다. 보통 경우의 반대였다. 고기가 식어버리기도 하고 다른 고기, 즉, 급기야 흑돼지 이야기까지 솔솔 나온다. 소고기를 앞에 두고 돼지라니! 초대한 남자는 다음번엔 돼지로 모시겠다며 약간 우울해지는 기분을 애써 누르며 식사 주문으로 분위기 반전을 꾀했다.
“식사는요? 늘 라면만 드시는 Y님은 뭘로 드시렵니까?”
몇 개 없는 메뉴를 훑어보다가 삼국지게임도 아닌데 된장찌개로 통일됐다. 통일이 중요했다. 서로를 쳐다보면서 뿌듯해했다. 역시 중늙은이 모임이었다. 라면이야기가 후루룩 면발처럼 쏟아졌다. 초대한 남자가 소고기 구워 먹다가 뭐가 아쉽다고 라면을 들먹인 것이다.
“나도 라면은 좋아하는데...”
“예,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이런 거 저런 거, 특히 달걀이나 다른 거 넣어서 먹으면 그건 라면 좋아하는 게 아니죠. 라면은 순수하게 라면만으로 먹어야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있어요. 그 맛을 즐겨야 라면을 진짜 좋아하는 거라니까요”
그러는 중 된장찌개가 나왔다. 라면은 온전히 라면만 먹어야 제맛이라는 남자가 끓고 있는 된장을 맛보더니 말했다.
“우리 엄마 생각나네.”
“아, 어머니께서 된장찌개를 잘 끓이시나봐요.”
여자 하나가 다시 분위기를 전환할 요량으로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뇨, 우리 엄마, 된장을 비롯해서 각종 음식 맛이 무맛이거든요. 조미료도 안넣고 감칠맛 없이 그냥 채소만, 된장만 넣고 끓여요. 이 된장찌개도 만만치 않네요.”
“아...예... 그럼 라면 즐기는 방법이 엄마 DNA를 물려 받으신 건가봐요.”
“에? 울 엄마 음식, 맛이 없는 맛이라니까요?”
“라면은 라면만 넣고 끓여야 진짜라면서요? 순수라면 맛, 엄마 된장찌개도 순수하게 재료만 넣고...그러니까...”
갑자기 라면 남자 Y님과 함께 초대받은 남자 세번째가 각성이라도 한 듯 말했다.
“근데 잠깐만. 라면 스프는 온갖 조미료를 넣어서 만든 맛 아닌가?
소고기맛도 날 거고, 달걀 맛도 들었을 걸. 채소 분말도 들어 가잖어.”
눈치 없는 것인지 복수할 요량이었는지 초대한 남자가 바로 말을 받았다.
“그럼 순수한 건 소고기뿐일세.”
라면파 Y님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아니, 라면은 라면만 끓여야 한다는데 거기에 된장찌개와 소고기는 왜 또 소환하십니까?”
“세상에 순수한 맛은 없다는 이야기지요. 아무리 라면만 끓여 먹어도, 된장찌개에 된장과 채소만 넣고 끓여도 온갖 맛이 다 섞일 수 있다고. 소고기는 아니고...”
초대한 남자 말끝이 살짝 짧아졌다.
여자 하나는 남자가 속 상한 것을 눈치챘다.
왠지 된장찌개를 먹는데 라면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된장맛과 다른 맛이 섞여 있는 기분도 들었다. 혀안에 도는 구운 소고기맛이 된장찌개맛을 감칠나게도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모르긴 해도 과학일 것이다.
순수라면파 남자 Y님은 여전히 돌아가는 차안에서 된장찌개가 맛이 없었다고 중얼거렸다. 소고기로 초대한 남자는 ‘소고기의 순수한 맛을 알고 좋아하는 일이 라면만 넣고 끓인 라면 맛을 아는 것보다 몇 배 순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의상 초대한 손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소화 시키느라 쳤던 당구는 초대한 남자가 판판이 졌다. 순수한 라면 맛과 무맛이라는 Y님 엄마의 된장찌개, 비싼 소고기의 순수한 맛의 차이가 계속 정리되지 않았다. 자신 속을 더 깊이 비집고 봤다면 아마도 이렇게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소고기를 대접한 내게 순수한 라면맛에 대해 지나치게 고집하는 Y님이 섭섭하구나. 소고기는 소고기일뿐이니 훨씬 순수한 건데.’
한편 함께 온 남자 세번째는 자신 집 앞에서 차에서 내리며 무릎을 쳤다. ‘아, 소고기맛 라면도 있잖아.’
여자 하나는 먼저 집으로 와서 내내 생각했다.
‘라면만 끓이면 순수하고, 소고기만 구우면 순수하고, 된장찌개에 조미료만 안넣으면 순수한가. 세상살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다들 순진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