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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틀란 Feb 07. 2021

파고 비우고 채우고

자극없는 영화, 더 디그

영화 <더 디그>는 실화가 소재인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영국의 한 과부가 2차대전이 나기 몇 달 전, 고고학자를 고용해 자신의 사유지속 유물을 파낸다.

과부는 심장판막이상으로 시한부를 선고받고 그 작업을 지켜본다.

명민한 아들은 엄마의 심각한 병증을 알고 어쩔 줄 몰라 한다.

호의적인 고고학자에게 울며 말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사람들이 ‘자신이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고 했는데, 어머니가 아픈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어머니를 지키는데 실패했다”고 슬퍼한다.  

그때 고고학자가 말한다.

모두 실패한단다. 매일 매일 실패해.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 있거든. 아무리 노력해도 말이야. 듣고 싶은 말은 아니겠지만.”

그러자 아들은 “어머니가 아는 것보다 강하다”며 당장 자신을 두고 떠나야할 엄마의 슬픔을 덜어드릴 일을 도모한다.      

명민한 아이는 매일 매일의 실패조차 매일 매일 시도해야 가능한 일임을 깨달은 것 같다. 매일매일 자신의 빈 공간을 시도와 실패로 채우면 눈 대신 마음으로 부모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눈보다 느리다. ‘백문이불여일견’이란 뜻도 새롭다.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 것보다 낫다’는 뜻이 아니라, 눈의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찾아낸 것은 6세기 앵글로색슨족의 빛나는 황금과 유물이었지만

진실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었고, 마음으로 봐야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무명의 고고학자를 비롯, 땅을 파고 섬세하게 흙을 걷어내서 유물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작업이 이어졌다. 빈 곳이 드러난다.

장자였던가. 각 분야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유명인물이나 왕이 아니라, 아웃사이더들이었다. 서툰 소잡이는 한 달에 한번 칼을 갈고 좀 더 잘하는 소잡이는 일 년에 한번 칼날을 간다. 하지만 진짜 경지에 오른 소잡이는 한번도 칼을 갈지 않고 소를 잡는다. 소의 뼈나 근육에는 칼을 전혀 대지 않는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고, 뼈와 근육사이의 빈 공간을 자른다. 그곳에 칼을 대면 힘들이지 않고도 자를 수 있다. 텅빈 공간을 가르는 마음의 힘이랄지. (그럼 LA갈비는 서툰 소잡이가 썬 고기가 되려나.)


인물들을 연결하는 고리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인물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영화를 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유물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세상에 전해지고 전문연구팀이 들어온다.

처음 발견한 무명의 고고학자에게 손을 떼라고 한다.

그렇게 못하도록 이끈 땅주인이 있었고, 말없이 흙을 나르는 일만 했던 일꾼의 노력을 인정해주는 무명의 고고학자, 남자주인공이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연구원 남편을 따라온 아내가, 비록 초보였지만 발굴의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했을 때, 확실히 그의 공을 인정해 주는 누군가가 있었고,

발굴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소리 없이 찍어서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있었다.

서로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다른 이들의 힘. 결국 나는 나 아닌 것들로 채워지는 것 같다.      


J.D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는 십대인 주인공이 모순덩어리인 세상과 사회에 반항하면서도 감동을 느끼고 인정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크리스마스 쇼에서 예수의 호화찬란한 분장을 만일 예수님도 본다면 구토할 것이라며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예수께서 진정으로 좋아한 사람은 그 오케스트라에서 작은 북을 치는 단원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죽 보아 왔는데, 부모와 함께 보러 갔을 때 나와 동생 앨리는 이 사람을 더 잘 보려고 자리를 옮기곤 했다. 그렇게 훌륭하게 북 치는 사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한 곡에서 북치는 기회란 단 두 번 밖에 없는데, 손을 쉬고 있을 때에도 그는 절대로 지루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러다가 북 치는 차례가 되면 심각한 표정을 하고 매우 멋지고 아름답게 북을 울려댔다.

그저 ‘호밀밭의 파수꾼’이 소원인 주인공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나야말로 끊임없이 소모되고 파내서 비워지는 공간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고 작은 타인의 진실한 기운들로 채워 다시 태어나는 인간이다. 파낸 유물이 떠난 빈 공간인 동시에,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아서 채워지는 그 무엇이다.      


오늘도 나는 나 아닌 다른 것들도 채워지고 있고 동시에 비워지고 있다. 그 작업이 ‘나’이다.     

<네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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