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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틀란 May 09. 2023

찔레꽃 노래들

5월, 아파트 사잇길의 낭만

   

넝쿨장미와 함께 다소곳이 얼굴을 내민 꽃이 있다. 찔레꽃이다. 아파트 사잇길 울타리에 짙은 다홍빛 장미들과 하얀 찔레가 멋들어지게 어울려 피어 있다.       


“흠흠흠... 향이 있어, 향이. 샤넬향수가 무슨 소용이야. ”     


은발의 소녀님 한분이 볼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찔레향을 맡고 계시다.     


“어디요? 진짜요? 흠흠흠...”     


처음 뵌 분 옆으로 비위도 좋게 바짝 다가서서 꽃앞에 코를 댄다. 진짜 향이 난다. 상큼하다. 그런데 너무 엷어서 콧평수를 넓히고 큰 숨을 들이쉬니 겨우 느껴진다.      


“워낙에 도시에는 잡스런 인공냄새가 많으니까 찔레꽃향이 약해진 건가봐요.”     


“글쎄, 비염 있는 거 아닌가요? 요즘사람들, 알러지 비염으로 냄새 못 맡는 사람, 많던데.”     


정말 내 후각이 문제인가 싶기도 했지만 시침 뚝 떼고 콧평수를 더 넓혀서 열심히 찔레꽃향기를 수집했다.      

 찔레꽃은 장미과다. 장미의 조상쯤으로 보면 된단다. 18세기쯤에 찔레꽃, 그러니까, 들장미에서 장미가 나뉘어졌다고 한다. 하얗고 얌전한 꽃잎 사이로 황금빛 암술 수술들이 다 보인다. 장미보다는 무더기로 피는 경우가 많다. 그렇구나. 넝쿨장미와 혈연지간이어서 찔레꽃이 더 잘 어울렸나 싶다. 손이라도 댈라 치면 가시가 찌르니 찔레라고 이름 붙였다지. 향이 더 순하게 오래오래 코를 찌르는 여운이 좋은 꽃이다.  

   

찔레꽃 제목을 가진 노래가 대표로 세곡 정도 떠오른다. 제주 출신으로 백설희선배에게 예명을 받은 백난아의 <찔레꽃>이다. ‘가요무대’ 인기곡으로 알려져 있는 이 노래는 1942년에 나왔다니, 은발소녀님도 아련한 노래라고 하신다. 나는 가요무대를 봐서 알아야 하는 세대이다. 그런데 어슴프레 이 노래를 부르던 누군가 기억이 난다. 엄마다. 엄마는 젊은 날 삯바느질은 하지 않으셨지만 기계를 들여놓고 옷을 짰다. 직조기계 같은 것이었는데 완성된 옷은 손으로 대바느질해서 짠 옷보다 매끈하게 나왔다. 일본책을 보면서 옷을 짰다. 일본에서 태어나 12살 해방되자 들어오셨던 엄마다. 암튼 옷짜는 기계소리 사이로 엄마의 흥얼거리는 이 노래가 들렸다. 이미자나 주현미, 최근에 임영웅까지 부르던 노래, <찔레꽃>이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이별가를 불러주던 그리운 사람아     


은발소녀님이 벤치에 앉아서 나지막히 읊조리시길래 물어보았다.     

 

“그,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노래불러주던 그 사람, 연인이었을까요? 옛날 분들은 이별도 되게 낭만있게 했나봐요.”   

  

떠나는 사람 가슴 뜯으며 가지 말라고 깽판치거나, 술 마시며 정신줄 놓는 것도 아니고, 살아올지 말지도 모르는 전쟁에 나가는 연인을 향해 이별가를 불러주다니! 혹시라도 판소리 춘향가 속 춘향이가 몽룡이와 이별하는 대목이었을까 상상하는데, 은발 소녀님이 그러신다.     


“북간도에서 남쪽 고향 생각하며 부른 노래라고 들었어요. ”    

 

찾아보니 잘 나오지 않는 3절에 그 대목이 있다. 천리객찬 북두성이 서럽도록 고향 그리다가 ‘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고 노래한다.      


이번에는 이연실의 <찔레꽃> 한소절 불러보라 하시며 훅 들어오신다. '헐, 이곡은 술 한잔 하고 외로운 심정일 때 불러야 폼나는 노래'라고 연막을 치고 부른 구절이 여기다.   

  

엄마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찔레꽃 하얀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이 따먹었다오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그 뒷구절은 생각이 안나서 찾아보았다. 속이 저몄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그러니까, 엄마는 지금 곁에 없고 엄마의 하얀 발목 닮은 찔레꽃인 거였다. 찔레꽃을 보면 그날밤 엄마 꿈을 꿨겠지. 찔레꽃 따먹으며 엄마를 기다리던 그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 꾸는 꿈.

     

이 노래 <찔레꽃>은 곡은 하나인데 노래는 세곡이 되었다. 포크 블루스 분위기인 <찔레꽃> 외에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으로 시작하는 <가을밤>, 그리고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로 시작하는 <기러기>가 있다. 노래만큼 기구한 것인지, 다양해서 좋다고 봐야하는지. 시대 탓일 것이다.     


한참 시간을 건너와서 직업만 열 대여섯개 겪고 45살에 늦깎이 데뷔를 한 장사익의 <찔레꽃>이 있다. 본인 작사작곡이다. 가요는 어차피 서양음계에 기반을 둔 노래인데, 장사익의 노래는 집안내림이겠지만 우리 가락에 서양음계를 녹여 지른다. 찐 한국형 가수라고 평가받는 이유이다.  

    

노래는 솔직히 어렵다. 오르고 내리는 구간과 절정구간, 흉내 못 낸다. 두 사람 다 잘 안되어서 동영상을 찾아 함께 들었다. 앞부분에 ‘하얗고 순박한’ 꽃이라 해놓고는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꽃이라더니, 완전 오페라처럼 북 두들기며 클라이막스에서는 질러 버린다. 이런 노래 따라 부르는 사람은 가창력 수퍼갑이다.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울다가 노래하다가 춤추다가 사랑하다가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본인의 인생이야기일까. 꽃 분위기와는 다르게 아주 진한 노래다. 뜬금포겠지만 샹소니에르 Edith piaf의 열창들이 생각나는 노래다. 듣기만 해도 막 뜨거워지는 노래다. 소박하고 서럽게, 혹은 겸손하게 부르는데도 희한하다.     


은발소녀님과 나는 아파트 사잇길 울타리에서 찔레꽃 향기를 맡다가 찔레꽃 노래들을 부르며 친구가 되었다. 다시 만날 기약은 하지 않았지만 내년 이맘때 찔레꽃 피면 서로를 기다리겠지. 아파트 사잇길에서 서성거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파트 공동주택도 낭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낭만이다. 지금 현재에 함께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사람. 


https://youtu.be/_wC0Vc4lBfo

https://youtu.be/IfKBEi4YJTE

https://youtu.be/xeeq0O3wJ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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