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을까...
‘내 마음안에 들어갔다 나왔나 보다.’ 노래를 듣는 이에게 노랫말이나 곡이나 너무도 아름답다. 듣다가 울컥거려서 눈물이 흐를 때도 있다. 위로를 받고 치유가 되기도 한다. 반복해서 듣고 노래 너무 좋다고 사람들에게 알린다. 팬심이 생기고 콘서트 소식 들리면 가기도 한다.
김윤아의 <Going home>을 듣는다. 삼일절 백주년 기념으로 만든 ‘삼일절 헌정곡’이라고 했다. 세 살 터울 친동생이 힘든 일로 마음 조이는 나날을 보낼 때 동생을 생각하며 쓴 곡이라고도 했다. 노래자체로 주는 위로가 크고 노래의 배경을 알면 더 그렇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정신없이 하루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주로 어떤 생각을 할까.
알프스 산 어디서 뛰어놀던 하이디는 노을이 바알갛게 지자,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할아버지, 왜 하늘이 빨갛죠?”
“어, 하이디야, 햇님이 잠 자러가면서 내일 다시 오겠다고 인사하는 거야. 너도 인사하렴.”
지은이는 그런 이야기 주고 받던 동생이 떠오른다. 자신만큼 아끼는 동생의 아픔도 함께다. 지는 해만큼 슬픈 마음으로 다 잘될 거라는 말밖에 해 줄 수 없어서 초조해지기도 하고, 열심히 산 너는 자격이 있으니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위로한다. 무력하지만 잔인하고 두려운 세상 버티다가, 언제라도 자신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라고 사랑을 건넨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속 ‘스칼렛 오하라’처럼 내일은 새로운 태양이 뜰 거라고 기도한다.
‘이 가수는 천재야. 어쩌면 이런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걸까.’ 노래 속 아픔이나 마음에 공감을 깊이 하면 노래 만드는 사람의 고통에 닫기도 한다. 덩달아 엉뚱한 생각도 한다. 음악이나 다른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에게 감동을 주니 아름다운 거라고만 해도 되는 것일까. 정말 예술을 대할 때 아름답다고만 즐겨도 괜찮은 것일까.
화가 고흐는 죽은 뒤 발견된 호주머니 속 쪽지에 썼다. ‘나만의 일, 그것을 위해 내 인생을 위험에 몰아넣었고, 그것 때문에 내 이성의 절반을 암흑 속에 묻어버렸다’ 고. 정신줄을 놓은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결국은 자신 그림에 자신 삶을 갈아 넣었기 때문이라는 판단이 든다. 우리는 지금 그의 작품에 대해 단순히 아름답다고 감동만 해도 될까.
릴케도 아내에게 비슷한 편지를 썼다고 한다. ‘예술은 언제나 위험천만한 경험의 산물이며 인간이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극단의 단계로 몰고 가는 경험의 산물’이라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의 ‘창조가 아니라 생과 사가 달려있는 일’ 이라고.
오늘도 우리는 예술 앞에서 각자의 삶을 반영하며 울고 웃는다. 나는 이 노래, 앞부분 노랫말에서부터 조용히 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이구나.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퇴근할 수 있는 삶이 부러웠지. 수십 년을 프리랜서로서 산 삶은 아침 해 뜨는 시간과 해 지는 시간, 밤낮이 따로 없었다. 남들 퇴근할 때 출근하기도 하고, 새벽같이 출근은 해봤어도 해지는 시간에 퇴근은 못해봤구나….
요즘은 노래도 소비한다. 듣고 없앤다. 레코드판을 조심히 닦아서 바늘을 정성스레 올리고 지글거리는 소음조차 아끼면서 듣고 몇 배의 시간동안 감동을 생각하며 만든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애썼던 시절이 있다(꼰대, 맞다). 들은 후에도 조심스레 닦아서 휘어지지 않게 모셔놓던 그런 ‘예술로운’ 노래 따위는 없다. 몇 백 원에 내려 받거나 잘만 하면 공짜로 파일을 받아 듣다가 질리면 지운다. 고흐의 복사그림, 릴케의 시 분위기로 챗 GPT들이 만든 글들도 비슷한 분위기를 주니까 상관없다. NFT로 가치가 있다면 투자할지도 모르겠다.
만든 이의 삶이나 고통 따위에 크게 관심 두지 않는다. ‘그게 뭐? 내가 왜?’ 내 고통을 그들의 고통으로 씻어내기에도 힘겨우니까. 그렇다면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창조물을 사람들이 곁에 많이 두니까, 자주 보니까, 괜찮은 것일까, 괜찮을까. 정말 괜찮을까.
별 생각 다 하게 만드는 노래 한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