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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틀란 Jun 19. 2023

차를 모는 사람들

길위의 면허

“필기는 한번에 붙은 사람을 실기를 세 번이나 떨어트릴 수 있냐고.”     


“아이고, 나는 필기만 세 번 떨짔구마는. 부럽소이.”     


초여름 저녁, 아파트 사잇길을 걷는데 담벼락 쪽 벤치에서 제법 높은 목소리로 이뤄지는 대화입니다. 안보는 척 설핏 보니 칠순은 넘긴 할머니 두분이시네요. 운전면허에 관한 대화가 이어집니다.       


“나이 칠십인데 막살 놓으까 싶기도 하고.”     


“뭐라하노? 인간 태어나서 해 볼 수 있는 거는 다 해봐야지.”   

  

이른 넘어 운전면허를 딴다 해도 75살부터는 3년마다 적성검사와 교통교육을 다시 받아야 한다던데 대단한 용기이고 열정이세요. 하긴, 요즘은 젊은이들보다 나이 든 분들이 훨씬 더 사는데 애착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해보니 되던 경험을 쌓은 까닭일 것 같아요.       


운전면허 따는 일을 최대한 미루다가 사는 도시와 일하는 도시가 달라졌을 때 할 수 없이 도전한 1인입니다. 누가 왜 운전면허가 없냐고 물어 보면 대답이랍시고 하는 게 이랬어요.      


‘어, 운전기사가 몰아주는 차 타려고.’     


물색없는 변명이었고 결국 사는 일에 닿아서 땋습니다. 필기는 그런대로 붙었는데 실기는 꽤 힘들었죠. 기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기 보다는 자동차가 무서웠습니다. 교통사고로 다치고 목숨 잃은 기사가 하루 멀다하고 언론에 날 때마다 생각했죠. ‘저건 살인무기야. 저걸 나더러 움직이라고? 차라리 탱크가 낫지...’ 일리 있는 면도 있었지만 수많은 지구인이 그 살인무기를 움직이며 밥벌이를 하고 있는데 나라고 외계인이 아니고서야 끝까지 외면할 수 없었던 거죠. 두 번째로 실기에 붙어서 차를 모는데 사고를 꽤나 많이 쳤습니다. 주로 스스로 벽에 박고 긁히고 쭈그러졌어요. 같이 사는 사람은 혀를 끌끌 찼습니다. “조심성 없고 전방주시 안해서이고 블라 블라...” 주야장창 소리를 들으면서 지금도 몰고 다닙니다.  

     

면허 하나 따는 일도 누구에게는 생의 사건인 자동차, 그런 차를 몰아 업으로 삼는 분들이 있습니다. 친구 아버지는 평생 택시를 모셨습니다. 회사택시를 수십 년, 그리고 개인택시를 또 이십여 년 모셨어요. 그렇게 삼남매를 대학시키고 결혼까지 다 시켰습니다. 모범기사셨고 그러는 당신을 자랑스러워하신다고 친구는 촉촉한 눈을 붉혔죠. 자가운전자가 늘고 길 위에 택시보다 자가용차가 대세가 되면서 그 위용은 잃었지만 최근 몇 년 전까지도 개인택시를 모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식들이 쉬시라 해도 그냥 차를 몰고 길을 나서는 게 편하다며 운전대를 잡으신다 했습니다.      


인디고의 노래 <옐로택시>(2004)가 떠오릅니다. 노란택시는 뉴욕의 대표택시색깔이라더군요. 런던은 검정택시, 홍콩은 빨간택시라던가요? 우리나라는 주홍이 대표지만 지자체별로 노란색을 법인택시의 색깔로 쓰게 하던 곳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법인 노란택시가 있더라고요. 새벽부터 일 나가면서 공부 열심히 해서 남보다 출세하라고 말씀하시던 원더풀 파파는 옐로택시의 운전기사셨죠. 비가와도 눈이 와도 운전대를 잡으며 청춘을 보냈던 아버지. 혹시라도 늦으면 사고라도 났을까 집 앞을 서성이던 어머니. 집한 채 장만하느라 고등어 한 마리에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고요. 자식들에게 대기업에 들어가고 당신처럼 살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넘버원 원더풀 파파’ 였다고 노래합니다. 


어쩐지 오기택의 <아빠의 청춘>(1964)과 겹치는 노래죠.      


이세상의 부모마음 다같은 마음아들딸이 잘되라고 행복하라고

마음으로 빌어주는 박영감인데노랭이라 비웃으며 욕하지마라

나에게도 아직까지 청춘은 있다(헤이)/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

부라보 부라보 아빠의 인생     


어쩐지 이 노래 가사는 많이 쓰고 싶어지네요. 무엇이 그렇게 ‘원더풀’이었겠습니까만, 노랫말로 아빠의 삶을 응원했던 거겠죠.  


기사분들은 사무직도 아닌데 늘 앉아서 일합니다. 쉬는 날이면 등산과 축구로 체력을 다독이고 늘 도시락을 드시던 ‘노랭이(죄송합니다)’도 많았습니다. 자식 학비 대야죠. 집도 사야하고요. 승객들과 나누는 이야기속에서 대중들의 생각도 재빨리 간파합니다. 비슷한 이유로 정치인들 중에 택시를 몰았던 몇 명도 떠오릅니다. 뭐랄까, 산업화 시대 ‘빨리 빨리’를 외치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을 대신해 주던 분들이고 민의를 알고 소문도 내주던 분들입니다. 미화하면 ‘길 위의 꽃’이었고 본인들은 ‘길 위의 인생’을 사셨어요, 원없이.        


2014년, 자이언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노래<양화대교>를 냈군요. 맞벌이하는 집에서 늘 혼자이던 아이아빠는 택시드라이버죠. 새벽퇴근이고 통화하면 늘 양화대교라고 대답합니다. 양화대교는 대한민국 서울의 업무 지구와 베드타운을 잇는 다리죠. 집과 직장을 오가는 손님들을 태우는 택시 기사인 자이언티 아버지의 일터입니다. 아빠의 양화대교를 이해하게 된 아이는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되뇌입니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소박하고 상식적인 삶의 소망을 안고 달리는 세상의 모든 기사님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수고 많으셨고 또 수고해주십시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길이 끝날 때까지요.      


아, 칠십 넘어 따려는 할머니들의 면허증은 당신들 인생에게 주는 셀프 표창장이자 기념품일 수 있겠네요. 어쩌면 살살 조심조심 연습하면 위급한 길, 서로에게 병원행은 해 줄 수도 있을 거고요. 간절함이 있습니다. 


저는 뭐, 차 타고 온갖 길을 오가면서 이분들 이야기를 보고 전하며 살다가….     

https://youtu.be/PCW_SwsNhnY

https://youtu.be/40iEy0AAztw

https://youtu.be/vfDb8uTp2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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