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와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 블루>
3월 1일 저녁, 100년 전 그 날을 기억하며 많은 사람들이 오간 후 한산해진 대전역 앞 거리에서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도 외쳤어야 했나, ‘대한독립만세’라고! 아니야, 아니야. 지금은 2019년인걸. 외침 대신 적당히 쌀쌀한 공기 속에서 심호흡을 해봤다. “하아...” 100년 전의 외침은 만인을 위한 것이었으나, 현재의 나는 소심하게도 혼자만 겨우 들을 수 있는 소리나 내고 있는 한심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허무맹랑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정말 필요한 질문일지도 모를 말을 내뱉으며 607번 버스에 올라탔다.
미카와 신지는 스쳐 지나가는 반복을 거듭한다. @영화 공식 스틸컷
최근 개봉한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는 도쿄를 배경으로 한 소시민들의 이야기다. 일용직 건설 노동자인 신지(이케마츠 소스케 분)는 함께 일하는 동료 토모유키(마츠다 류헤이 분)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와 갓 만나기 시작했던 간호사 미카(이시바시 시즈카 분)와 만나게 된다. 사랑을 믿지 않는 미카, 그런 미카를 사랑하기 시작한 신지 사이의 공백을 좁혀주는 요소는 불안정한 일본 사회와 죽음에 대한 공포다.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라 그만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외국 영화의 제목을 번역할 때 한국 정서에 맞게 고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목도 긴 이 영화는 일본어와 영어 원제도 동일하다. 배급사가 그렇게 정한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의 색깔을 잘 드러내기 때문에 긴 문구임에도 원제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 아닐까 싶다. 영화는 도쿄를 배경으로 하지만 한국으로 치환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도시와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다. 미카의 대사 중 “도시를 사랑하게 된 순간 자살하는 거나 마찬가지야”라는 말은 내 가슴을 훅, 하고 찔러 왔다. 그 말은 내가 옥천으로 귀촌하기 전 서울에서 느꼈던 감정과도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도시의 가장 큰 매력은 익명성이다. 나를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되는, 남이 관심 꺼주면 오히려 잘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은 곳이 도시다. 미카는 본가인 시골에 가서 오히려 자신의 사정과 속 마음이 까발려진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본가에서 도망쳐 나오고, 도쿄에서 걸음이 느긋하며 머물러 있다.
감독은 한 쪽을 보지 못 하는 신지의 시선을 잘 이용했다. @영화 공식 스틸컷
전작 <행복한 사전>, <이별까지 7일> 등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이시이 유야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도쿄의 밤 풍경과 함께 애니메이션, 다양한 촬영 기법 등을 통해 사람들의 욕망과 인물들의 정서를 잘 드러낸다. ‘죽음’이라는 소재를 이미 전작에서 다룬 바가 있어서인지,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내는 힘이 인상적이다.
간호사인 미카는 죽음으로 인해 세상과 문을 닫았다. 그래서 죽음이 일상인 병원 현장에서 일할 수 있었다. 신지는 죽음의 공포를 안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희망을 주절거림으로 대체한다(이건 영화에 나옴). 그들 사이에서, 사실은 우리 사이에서 교차하고 있는 이별과 만남 사이에서 결말이 날 수 있을까?
농업과 음식 관련 책을 주로 출판하는 땡땡 친구출판사 도서출판 따비에서는 작년 11월에 의미 있는 책 한 권을 출간했다. 고 백남기 농민을 지켜내기 위해 만나고 함께 싸워 온 사람들의 이야기인 투쟁 기록집을 <대한민국 치킨展>으로 알려진 정은정 님이 대표 집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가 있어 반가웠다. 세상에 태어난 그 책의 이름은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아스팔트 농사’라는 말이 있다. 작년 하반기와 얼마 전까지 농민들은 부지런히 아스팔트 위로 나와 농업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해 왔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담은 책이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펼쳤다.
이 책의 본문은 전남 보성군 부촌마을 고 백남기 농민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사진으로 시작한다. 나무로 우거진 좁은 길 사이로 안개가 가득한 지리산이 보이는 이 사진이 나를 울컥, 하게 만들었다. 고 백남기 농민이 민중총궐기에 참가하기 위해 저 길을 나서던 2015년 11월 14일 아침이 그려지는 느낌이었고 나는 책을 붙들고 펑펑 울었다. 나 역시 광화문 현장에 있었다. 물대포를 맞으니 온 몸이 아팠지만 함께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서로를 붙들고 그렇게 젖어갔다. 대열에서 잠깐 나와 일행들과 함께 숨을 고르고 있는데 구급차 한 대가 급하게 달려왔다. ‘뭐지, 뭐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차가 지나간 자리에 서 있었는데 멀지 않아 소식이 들려왔다. 쓰러진 농민이 위독하다고. 그게 그와의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백남기 농민이 보성을 나서 서울로 가던 순간에서 시작해 이 책은 고 백남기 농민을 지켜내기 위해 355일을 싸웠던 이들의 목소리를 담담히 담아간다. (공교롭게도 앞서 소개한 영화의 색감처럼) 새벽의 짙푸른 기운이 가득한 윤성희 님의 현장 사진은 그날의 정서를 스산하게 표현한다. 한편 이 투쟁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얼굴은 밝은 미소를 띠고 있다. 책 표지의 문구처럼 ‘죽음조차 선물이었던’ 농민 백남기. 그의 죽음은 우리의 가리워진 길을 돌아보게 했고, ‘탄핵 촛불’의 불씨가 되어 지금 한국 사회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노란 물결이 가득한 논에서 나는 백남기 농민을 떠올렸다
대학교 1학년이던 2000년 7월, 서울 종로에서는 수입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대회’가 크게 열렸다. 무더위 한 가운데의 여름이었지만 전국에서 많은 농민들이 모였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종로 한가운데를 가득 메워 걸었다. 아스팔트 지열로 인해 현기증이 올라오는 가운데 내 앞에 있던 트럭에서 고추 더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농민 분들이 오시더니 그걸 불로 태웠다. ‘수고해서 농사지은 저 고추를 태우다니...’ 오죽 답답하셨으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 때문인지 고추의 매운 연기 때문인 건지 나는 그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공교롭게도 그날 나는 전경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살이 찢어져 19년이 지난 지금도 오른쪽 손목에 흉터가 남아있다. 여름이 되면 그 상처를 자주 바라본다. 그리고 이제 나는 농업 현장에서 농민들을 위한 일을 업으로 하고 있다.
고 백남기 농민을 지켜냈던 2016년의 가을, 서울대병원에서의 추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 탓인지 작년 가을 농업 현장에 가면 여기저기서 백남기 농민이 살아생전 모습이었을 것 같은 농민들의 모습이 많이 떠올랐다. 책 끝 부분에는 지난 시간 동안 먼저 떠나간 농민 열사들의 명단이 있다. 노동 관련 열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었던 그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도 우리는 식량자급도 23%라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우리 농산물로 소중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2016년 10월 26일의 아침, 푸르스름한 새벽의 그 기운을 기억한다. 백남기 농민을 지켜냈기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우리는 ‘수고했다’며 서로 껴안으며 환호와 동시에 눈물을 흘렸다.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은 결국 세상을 바꾸게 하는 희망을 낳았다.
@영화 공식 스틸컷
“어디에 있어? 거기까지 한번 뛰어가볼게!”
한쪽 눈 밖에 보이지 않는 신지는 미카의 집으로 달려간다. 불안과 공포, 두려움 속에서 그들을 살아있게 한 것은 죽음이 단순히 ‘종료’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한 절규였다. 세월호가, 밀양이, 용산이, 백남기가, 김용균이, 그리고 평범한 내 이웃으로 보일지 몰라도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그렇게 허무하게 ‘종료’되지 않도록 절규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도 희망을 찾고 있다. 믿고 싶다. 다시 웃을 수 있는 그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
책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 (2018)
도서출판 따비 펴냄 ∥ 정은정 글 ∥ 윤성희 사진
* 땡땡책방(http://00bookcoop.com)에서도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2019)
감독 이시이 유야 ∥ 출연 이케마츠 소스케, 이시바시 시즈카, 마츠다 류헤이 등 ∥ 러닝타임 108분
All Night, All Right
땡땡책협동조합 친구출판사의 책들과 다른 문화예술 장르의 만남.
여러분의 깊은 밤은, 언제나 옳으니까요.
글쓴이. 루카
경계선에 서서 두 개의 세상을 바라보는 작업을 즐긴다.
이도 저도 아닌 삶이 익숙하다보니 방황하는 것 같아도 그게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