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눈으로 보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를 읽고
20대 때 나는 문학 소년이었다. 감수성이 풍성했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고등학생 때 본 김남주의 시집의 영향이 컸다. 김남주는 세상을 바꾸는 무기로 문학을 택했고, 나 또한 세상 바꾸기 위해 시인이 되고 싶었다. 김남주, 박경리, 조세희, 박노해, 박완서, 브레히트가 내 마음을 움직였듯이 나의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었다. 당시 나는 숫자로 된 것들을 터부시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숫자나 논리가 아니라 정서적인 접근이고,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두부 자르듯 그렇게 이성과 감성, 논리와 감정, 숫자와 이야기를 나눌 일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30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문학보다는 수학, 과학 분야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연스러운 변신이기도 했다. 서른 살에 입사한 첫 직장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 노조 활동을 하면서 내게 필요한 것은 명확한 논리적 사고였고, 숫자에 기반한 데이터와 근거였다. 마침 내가 속한 전쟁없는세상도 그즈음부터 비폭력 트레이닝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비폭력 트레이닝에서는 숫자가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운동 캠페인을 기획하고 연습하고 실천하는 데 수학적 사고방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수학, 과학 분야 중에서도 특히 수학사와 과학사를 재밌게 봤다. 수학공식 외우거나 원소기호 외우는 거는 예나 지금이나 관심이 생기질 않았다. 혹은 그리스의 철학자들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을 파악하거나 설명하고 싶은 욕심도 나는 없다. 하지만 지식으로서 수학 혹은 과학이 어떤 시공간적 배경에서 탄생하고 발전했는지 알아가는 일은 무척 흥미로웠다. 예컨대 수학이 그저 수학으로 존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수학이 어떻게 인간의 역사를 움직여 왔는지는 무척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수학의 눈으로 보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꽤나 재미있는 책이다. 수학 이야기이면서 영화, 드라마, 책 비평이고, 수학이 세상과 어떻게 만나고 그 만남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며 현재의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사회 비평서다.
흔히 수학적으로 생각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숫자나 그래프, 표를 떠올리곤 한다. 물론 그 도구들 또한 수학이 세상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숫자를 이용하고 그래프나 표를 그린다 한다고 해서 우리의 사고가 수학적 사고에 기반 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예컨대 <가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지도 『신곡』> 챕터를 보자. 『신곡』은 지옥의 형상을 수학의 도구인 기하학 구조-갈수록 면적이 좁아지는 뒤집어진 원뿔형 구조를 이용해서 설명한다. 하지만 단테가 중세의 지식을 총정리한 『신곡』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수학적의 언어로 세상을 원리는 찾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진리의 기준을 재정립하는 것이었고 기하학은 그를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논리와 이성에 바탕한 수학적 사고, 관찰과 실험을 통한 입증이라는 과학적 방식보다는 믿음의 세계를 강화하는 것이 단테의 사고방식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챕터는 수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줄 알았던 두 인물 김정호와 나이팅게일의 이야기다. 이 두 인물은 단테처럼 수학적 도구를 사용했지만, 단테와는 다르게 수학적 태도로 세상을 관찰하고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풀기 위해 논리적 사고를 하였다. 김정호는 단순히 ‘백두산을 여덟 번 오르고 전국을 세 번이나 돌았’던 ‘집념과 끈기’의 아이콘이 아니라, 조선의 지도 제작 기술을 집대성하고 발품 팔아 수집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한 분석가였다는 것이다. 나이팅게일 또한 오늘날 간호사들의 나이팅게일 선언에 나오는 섬김, 봉사, 헌신, 사명, 신앙의 아이콘이기보다는 추진력 좋고 정치력 뛰어난 의료행정가였고, 영국 왕립통계학회의 최초 여성 회원일 정도로 뛰어난 통계학자였다고 한다. 나이팅게일은 현대적인 위생과 간호 시스템을 정립해서 의료 현장을 크게 개선했는데, 그 바탕에는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여 해결책을 찾아가는 수학적 사고가 바탕이었다 한다. 물론 뛰어난 통계학자로서 크림전쟁 당시 군인들의 사망 원인을 분석하고 그 정보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하는 등 수학적 도구를 활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김정호나 나이팅게일은 수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수학적 도구를 활용해서 큰 성취를 얻었고 이는 마땅히 박수 받을 일이다. 그렇지만 그 성취 또한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수학의 역사를 통사로서 보여주지는 않지만 챕터마다 언급되는 수학의 역사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흐름을 정리할 수 있다. 수학은 실용적인 학문인 동시에 세상의 원리를 설명하는 언어로서 탐구되었다 한다. 나일강의 잦은 범람으로 홍수 이후 온통 뒤섞인 땅의 주인을 가리기 위해 측량이 발달한 이집트의 수학이 전자이고, 유클리드,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학을 탐구한 그리스 수학이 후자다. 그리스 수학의 전통 덕분인지 수학이 마치 종교처럼 절대불변의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수학 또한 인간의 모든 지식이 그렇듯 역사적 산물일 따름이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에는 수학의 발달로 인한 지도 제작술의 비약적인 발전도 중요하지만, 김정호가 살던 시기 조선의 정치적 상황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모두든 손안에 구글 어스 하나쯤은 가지고 다니지만 과거 지도는 지배자를 위한, 지배자만의 지식이었다. 통치를 위한 정보였고, 군사 작전을 위한 필수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나 지도를 만들거나 유통 시킬 수 없었다. 김정호가 살던 19세기 후반은 조선의 국세가 기울어져 가던 시기였고, 반면 새로운 사상과 과학기술이 물밀 듯 밀려오던 혼동과 변화의 시기였다. 또한 당시 실학자들이 보던 책 가운데 『기하원본』은 유클리드의 『원론』을 번역한 것이었다고 한다. 지도가 품고 있는 역사적 의미에 당시 시대적 상황이 더해지고 거기에 김정호라는 뛰어난 데이터 분석가의 등장이 대동여지도의 탄생을 위한 필요조건이었다는 것이다. 나이팅게일 또한 마찬가지다, 당시 여성이 전문직으로 사회진출하기 쉽지 않은 상황과 제국주의 영국의 거듭된 전쟁으로 부상병들이 넘쳐나는 정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이팅게일은 〈영국군대의 건강, 효율, 병원 행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에 관한 노트〉를 작성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시대가 수학의 발전을 촉진시키기도 하고, 수학이 시대의 방향을 이끌기도 했다.
이 책이 유클리드의 『원론』, 혹은 단테의 『신곡』만 이야기하고 있었다면 좋은 책은 될 수 있어도 재밌는 책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 책은 수학의 기원과 역사만 파고드는 게 아니라, 사회비평서 답게 현대 사회의 여러 이슈와 쟁점에 대한 수학적 비평을 시도한다. 특히 요즘 세상의 가장 뜨거운 쟁점인 페미니즘의 이슈들에 대해 수학의 언어로 다가서고 있다. 수학과 페미니즘의 관계가 궁금한 사람들은 <통계가 이야기하는 성별임금격차의 진실 『82년생 김지영』>과 <수학이 잘못된 편견을 강화할 수도 있을까? 『아주 친밀한 폭력』> 챕터를 먼저 읽으면 된다.
하지만 무언가 똑 떨어지는 정답은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예컨대, 성별임금격차가 심각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데이터를 기대한다거나, 남성이 여성보다 수학을 잘한다는 것이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증거를 알려주기를 바랐다면 말이다. 이 책은 그보다는 수학적 태도를 가지고 우리가 사회문제에 던져야할 질문을 이야기한다. 즉 남성이 여성보다 더 힘든 일을 더 오래하기 때문에 임금이 더 높은 것이 당연하고, 성별임금격차를 이야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데이터를 오독하거나 왜곡한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계산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숫자 너머 진실을 보기 위해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왜 여성은 짧은 시간 일하는 저임금에 종사하게 되는지, 여성의 경력단절은 과연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묻지 않는다면 숫자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수학을 잘한다는 편견 또한 그렇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렇지 않다는 데이터를 찾는 일보다는, 우리가 과학적인 통계라고 믿는 것들이 실은 편견에 기반한 숫자이고, 그 숫자는 다시 편견을 강화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학에도 ‘사회적 지문’이 묻어 있는 바, 옳은 답을 찾는 것 못지 않게 옳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가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수학의 기원과 역사에서부터 현재 한국 사회의 뜨거운 쟁점까지 책과 영화, 드라마 이야기를 곁들이다 보니 이게 수학책인지 철학책인지 대중문화 비평서인지 사회비평서인지 헷갈리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책의 매력이다. 수학책이되 수학이 만능키라고 주장하지 않고 수학에 새겨진 인간의 욕망과 의지의 역사를 살펴본다.
물론 군데군데 수학공식이 등장한다. 내 경우는 도형이 등장하면 그나마 이해가 됐는데 사잇값이나 수열을 풀이한 내용은 솔직히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책을 들춰보다 이런 공식을 먼저 보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뛰어넘어도 된다. 그래도 책 읽고 이해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으며, 말했듯이 수학으로 말을 걸지만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수학보다는 인간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수학이 어려워 수학을 포기했던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더더욱 이 책을 통해 수학적 태도를 익힐 수도 있다. 수학 공식은 몰라도 수학적 태도를 익힐 수 있다면, 대학 입시 끝난 사람들에게는 그것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예전에는 사회과학 세미나에서도 브레히트의 시를 읽자고 주장할 정도로 주구장착 문학만 읽었는데, 어느날 시가 내게서 떠난 것을 느끼고 그 빈자리를 열심히 수학사, 과학사 책으로 채우고 있다. 땡땡책 협동조합 이사이며, 전쟁없는세상 사무국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 책, 영화, 드라마 들
책
움베르토 에코 (지은이), 이윤기 (옮긴이) | 열린책들
단테 알리기에리 (지은이), 한형곤 (옮긴이) | 서해문집
이바라키 타모츠 (지은이), 공순복 (옮긴이) | 군자출판사
영화
월-E
감독 앤드류 스탠튼 | 출연 벤 버트(월-E / M-O 목소리), 엘리사 나이트(이브 목소리)
이미테이션 게임
감독 모튼 틸덤 | 출연 베네딕트 컴버배치(앨런 튜링), 키이라 나이틀리(조안 클라크), 매튜 구드(휴 알렉산더)
라이프 오브 파이
감독 이안 | 출연 수라즈 샤르마(소년 파이 파텔), 이르판 칸(파이 파텔)
21그램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 출연 숀 펜(폴 리버스), 베니시오 델 토로(잭 조단), 나오미 왓츠(크리스티나 펙)
스모크
감독 웨인 왕 | 출연 윌리엄 허트, 하비 케이텔, 스톡카드 채닝
드라마
라이어 게임
연출 김홍선 | 극본 류용재 | 출연 이상윤, 김소은, 신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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