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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땡책협동조합 Jan 22. 2020

밝고 따사로운 햇볕이 더 많은 여성의 얼굴을 비추길

모녀 관계를 중심으로 본 <벌새>, <82년생 김지영>, <윤희에게>

“아부지, 나도 글 배우면 안 돼요?” 이제는 세계적인 유튜브 스타로 거듭났지만, 박막례 유튜버의 유년 시절은 불우했다. 머리가 똑똑하고 의지도 있었으나 끝내 공부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여자가 글을 배우면 결혼해서도 집을 나간다’는 부친의 아집 탓이었다. 부친은 ‘아들이 없으니 가르칠 사람이 없다며’ 조카를 데려와 한글을 가르쳤다. 사람을 부려 농사일을 할 정도로 ‘잘사는 집’이었지만 박막례 씨는 온종일 농사일을 거들었다. 식당일을 하다 어느덧 일흔이 되었다. 이제 ‘관짝’에나 들어가야지 싶었을 때였다. 손녀의 손에 이끌려 유튜브를 시작했다. 삶의 반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위즈덤하우스, 2019) 표지


2019년 한국영화계엔 두 바람이 불었다. 독립영화의 붐과 여성 서사의 대두라는 두 바람. 그중 8월 말 영화 <벌새>를 시작으로 10월 말에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 그리고 영화 속 배경처럼 겨울의 시작을 알리며 개봉한 영화 <윤희에게>까지, 세 편의 영화를 빼놓고서는 그 바람을 설명할 수 없다. 세 편의 영화는 서로 다른 결과 매력을 지녔지만, 눈에 띄는 공통점도 있다. 모두 엄마와 딸이라는 모녀 관계를 축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속 엄마들이 살아온 삶의 굴곡은 하나같이 앞에서 언급한 박막례 유튜버의 삶의 굴곡과 정확히 포개어진다. 


<벌새>의 은희 엄마, <82년생 김지영>의 지영 엄마 미숙, <윤희에게>의 새봄 엄마 윤희가 지나온 삶의 굴곡은 박막례 씨의 유년 시절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만 같다. 세 사람 모두 청소년기 가부장의 결정에 따라, 남성 형제의 대학 진학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곧바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박막례 씨가 밥집을 운영했듯 은희 엄마와 미숙은 각각 떡집과 죽집을 운영하고, 윤희는 조리원 노동자로 일한다. 이처럼 세 사람은 소위 전문직이 아니라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영화 속 엄마들은 슬하에 딸을 두고 있다. 딸은 그들이 외부 요인으로 이루지 못했던 과거의 바람, 즉 대학 진학과 취업이라는 꿈을 대리 실현할 존재로 여겨진다.


세 편의 영화 속 엄마와 딸의 관계는 각별하다. <벌새>에서는 주인공 은희가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김보라 감독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가닿고 싶은 존재로부터 멀어지는 공포와 심연”을 그리기 위한 연출이었다고 설명했다. <82년생 김지영>에서 미숙과 지영의 관계는 미숙이 자신의 엄마로 빙의한 딸 지영을 껴안고 ‘금 같은 내 새끼, 옥 같은 내 새끼’라며 눈물 짓는 장면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 네 엄마야.” <윤희에게>에서 윤희는 새봄이 말하지 않은 것들을 척척 맞추며 이렇게 말한다. 새봄은 그런 엄마 윤희에게 첫사랑과의 재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치밀하고도 유쾌한 음모를 꾸민다.


<윤희에게> 스틸컷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82387&imageNid=6671976


엄마와 딸은 상대의 일상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지지한다. 가령 취직은 무슨, 결혼이나 하라며 지영을 나무라는 자신의 남편 앞에서 미숙은 외친다.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육아 때문에 지영이 복직을 포기하려 하자 미숙은 가게를 접고 아이를 볼 테니 ‘하고 싶은 것 다 하라’며 지영을 북돋는다. 윤희와 새봄의 관계는 보다 양방향이다. 윤희는 새봄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새봄은 윤희에게 첫사랑과 재회라는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 <벌새>에서 은희는 부족한 엄마의 사랑을 영지로부터 받는 것으로 보인다.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79482&imageNid=6671390


세 영화 속 모녀는 살뜰히 서로를 챙기며 서로 돕고자 애쓴다. 박막례 유튜버가 나이 일흔이 되어서 손녀의 손에 이끌려 유튜버로서 인생 제2막을 시작한 것처럼, 영화 속 세 모녀는 다른 여성이 내민 손을 잡아 새로운 일상을 꾸린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의 말과 편지로부터 받은 따듯한 호의를 가지고 미래를 다짐한다. 지영은 엄마의 지원에 힘입어 학창 시절 꿈꾸던 작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고, 윤희는 딸과 함께 오랜 거처와 직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자리를 잡아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세 영화 모두 밝고 따사로운 햇볕이 주인공의 얼굴을 천천히, 그리고 길게 비추며 끝난다.


<벌새> 스틸컷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79307&imageNid=6661197


최근 한국 영화에서 ‘엄마’들의 삶을 사뭇 유사하게, 그리고 모녀 관계를 동지적 관계로 표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단일한 이유가 아니라 여러 요인이 상호작용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그 요인들이란 여성 서사를 주목하는 새로운 감독들의 등장, 여성 소비자의 의식화 및 성장, 무엇보다 2016년부터 더욱 가속하고 있는 영화계 안팎에서의 ‘페미니즘 리부트’ 등이다. 시장을 만들고 소비하는 다양한 주체와 문화의 변화가 맞물려 여성 서사가 평단과 시장의 선택을 받은 2019년 한국 영화는 더없이 풍성했다. 2020년 새롭게 관객을 만나는 영화들은 또 어떤 엄마와 딸의 모습을 그릴까. 더 많은 여성이 다른 여성의 손을 마주잡고 나가는 이야기가 나오길, 밝고 따사로운 햇볕이 더 많은 여성의 얼굴을 비추길 기쁜 마음으로 기대한다. 


<벌새> 김보라 감독이 '은희들'에게 보내는 편지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79307&imageNid=6670162




글쓴이 김영훈(출판편집노동자)


* 글은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 선생님과 함께 진행한 비평쓰기모임 [충분히 읽었다이제는  시간] 최종과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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