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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현 Oct 23. 2019

디자이너의 OKR

디자이너, 그 고행의 길

1. 좋은 물

Photo by Johnny Brown on Unsplash

 흔히 무형의 물질인 '물'은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그릇에 담긴다. 내가 목이 마르다면 컵에 물을 담아 마시면 된다. 컵에 담긴 물은 사람마다 달리 느껴지기도 한다. 같은 9도씨의 물도 누구에게는 차갑고 누구에게는 미지근하다. 또 누구는 머그컵에, 누구는 텀블러에 담아 마신다. 그럼 그 물이 좋은 물인지 아닌지 어떻게 측정할까. 그것을 위한 기준이 필요하다. 수질(정량적)이 될 수도 있고, 시음(정성적)이 될 수도 있다.

 디자이너는 스스로 결과물에 만족하기 어려운 직군이다. 눈에 보여 누구나 한마디 덧붙이기 좋은 디자인 결과물은 ‘뇌피셜’을 기반으로 한 “일반적으로, 누가 봐도, 보통 그렇잖아요”가 따라온다. 우리는 그 보통의 반창고를 하나씩 누적하며 홧김에 지른 항공권의 출발 날짜만 고대하는 숙명을 감내하고 있다. 나도 수없는 날을 헛헛한 숨을 몰아내며 버텨왔다.


2. 되물어보기

 내가 학교의 웹진을 발행하던 고등학생 때 작곡가 윤일상 님과 서면 인터뷰를 했다. 그는 어설프기도 민망한 나의 질문들에 장문의 글로 답변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한 때 TV를 켜면 모든 방송에서 제 노래가 나올 정도로 바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 둘 제 노래가 사라지더니, 결국에는 모든 방송에서 사라졌습니다. 몇몇 PD들이 담합해 프로그램에서 제 노래를 더 이상 삽입하지 않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결정이 억울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 한참 슬럼프에 빠져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모든 것이 나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자 원망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편해졌고 슬럼프도 해결되었습니다.”

 주변의 동료들이 너무 쉽게 던지는 말들로 인해 힘들다면, 스스로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 되물어보자. 끓어오르는 내심의 온도를 잠깐 식히고 충분히 내 의도가 전달되었는지 되짚어 보자. 무조건 도취되어 ‘자뻑’에 빠지지도 말고, 자평을 해보자.


3. 수행의 길

 디자이너는 수행자가 아니다. 매번 그런 식으로 참아내고 삼킬 순 없다. 성과에 충분한 보상이 따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디자이너의 성과를 정량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얼마나 어떻게 잘한 것인지, 그 성과가 모두 디자이너 역량에 의한 것인지 나눌 수 없다.

 최근에는 디자이너가 UX 설계와 심지어, PM의 역할까지 하는 맥가이너(만능 팔을 가진 디자이너)가 됐다. R&R을 넓히는 것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쏟아지는 주변의 주관적 리뷰들로 성과를 단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요동치는 감정을 다잡고 오롯이 내 업무를 하기 위해서 명확한 목표와 결과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필요하다. 그래야 수행의 길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4. 디자이너의 OKR

Photo by Nick Fewings on Unsplash

 구글에서 성공적으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진 OKR(Objectives and Key Results)은 흔히 팀의 비즈니스 목표(Objectives)를 설정하고, 성과를 측정(Key Results)하는 데에 사용된다. 목표를 세우고 성과를 측정하자는 것이 OKR의 전부다. 성과 지표인 KPI와 비슷하지만, OKR은 명확하게 목표 지향적 관점의 방식이다.


 내가 5년 차 디자이너일 때 영상과 웹사이트를 제작하는 작은 에이전시를 다녔다. 그곳은 독특한 업무 성과 지표를 적용하고 있었는데, 연초에 모든 직원이 스스로 연간 지표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디자인 시안 채택률 70% 달성'과 같은 업무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 '디자인 관련 글 2개 이상 작성' 등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것도 있다. 특히 회사를 위해 특별히 할 수 있는 일 1개를 반드시 지표에 넣어야 했는데, 나는 '좋은 음악 주 1회 공유하기'를 지정하기도 했다.


 나는 그 경험을 토대로 OKR을 디자이너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1. 회사 직무 관련 목표(O) 한 개, 커리어 관련 목표(O) 한 개를 각각 지정한다.

 목표는 최대한 이상적이면서 스스로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달성할 수 있을 만한 것을 정한다. 회사 직무 관련 목표는 '긍정적인 디자이너 되기', '리더로서 인정받기', 'XX파트로 옮기기' 등과 같이 다양한 목표 설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커리어 관련 목표는 궁극적으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이어야 한다. 'CPO(Chief Product Owner)되기', '성공적인 스타트업 CEO 되기'등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반드시 이루고 싶은 것이어야 한다.


 2. 달성률을 체크할 수 있는 성과지표(KR) 다섯 개를 각각 정리한다.

 막상 성과지표를 적어보려 하니 막막할 수 있다. ‘긍정적인 디자이너 되기’에 대체 어떤 지표를 올릴 수 있을까. ‘긍정적’이라는 단어를 택했을 때 이유를 다시 떠올려 보자. 유관 부서와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거나, 방어적 태도가 됐다고 스스로 느꼈거나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의 실행 안을 측정 가능하게 정리해 볼 수 있다. 달성률 측정과 달성 여부 측정 두 가지의 지표 모두 사용할 수 있다.

    (O) 긍정적인 디자이너 되기

    - (KR) ‘안돼요’라고 말하지 않기

    - (KR) 유관 부서와 주 1회 이상 식사하기

    - (KR) UX 개선안 월 3개 이상 먼저 제안하기

    - (KR) 디자인 가이드 시스템을 온라인 스레드로 배포하기

    - (KR) 쌓여있는 디자인 이슈 주 1회 이상 처리하기


 3. 매주 주기적으로 달성률을 체크하면서 관련 이슈도 함께 정리한다.

 이미 측정 가능한 성과지표로 정리된 리스트를 매주 체크해보면, 어느 순간 업무 만족도가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달아오른 마음을 달래고 차분하게 자존감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O) 긍정적인 디자이너 되기

    - (KR) ‘안돼요’라고 말하지 않기 : ✔️완료

    - (KR) 유관 부서와 주 1회 이상 식사하기 : 80%

    - (KR) UX 개선안 월 3개 이상 먼저 제안하기 : 65%

    - (KR) 디자인 가이드 시스템을 온라인 스레드로 배포하기 : 실패

    - (KR) 쌓여있는 디자인 이슈 주 1회 이상 처리하기 : 100%

 여기에 관련된 이슈를 함께 정리하면 좋다. 수행한 내용과 코멘트 모두 이슈에 해당된다.


마무리

Photo by Sasha Freemind on Unsplash

 내가 OKR을 해보자고 다짐한 이유는 디자이너로서 '성과'라는 것을 가져 볼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계기로 명확한 목표와 실행 방안이 생기고, 더 중요한 것은 심리적으로 단단한 무게감이 생긴다. 내가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 방향감을 가지게 되면, 어떤 요인에 의해 타격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OKR을 수행하면서 기록한 문서는 연봉 협상에도 유효하게 쓰일 수 있다. 디자이너로서 원하는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룰 수 있는 목표를 만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성과를 즐겨보자. 언젠가는 고행의 길도 여행의 여정으로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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