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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현 Sep 02. 2020

여성 속옷 스타트업에 입사한 남자 프로덕트 디자이너

'신권력'을 실현하는 더기프팅컴퍼니

 요즘 매일 오전 5시에 기상 알람을 맞춘다.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로 정확히 100분이 걸리는 새 직장으로 출근하기 위해서다. 잠자리가 늦은 아내가 막 잠에 든 시각이기도 하다. 신나게 뛰놀던 두 고양이마저 잠에 취해 집 안은 위-잉하는 공기청정기 소리가 내 귀에 전부다.


 지난해 나는 한동안의 지진을 겪었다. 프로덕트와 비즈니스 모두 고도화를 거듭하며 좋은 동료들과 좋은 합을 늘려 가던 때, 갑작스러운 팀의 사망선고와 기적적인 부활 소식을 하루에 몰아 들었다. 애정과 애증이 섞인 그 서비스를 떠나며, 이제는 내 이력에 볼드체를 넣을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얕은 다짐이 있었다.


 그 후 방황이 길었다. HMS 스타트업과 AI 스타트업 두 곳을 짧은 기간 거쳤다. 두 번의 이직 실패를 겪은 이에게 예민할 정도의 신중함은 당연한 이치다. 수십 개의 JD를 읽었고, 지원과 면접을 반복했다. 심지어 처음으로 헤드헌터에게 연락하기도 했다. 몇몇 헤드헌터들의 연락이 수시로 왔다.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영역 안으로 나를 밀어 넣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커리어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결정이 쉽지 않았다.


 나는 평범한 워터폴 조직을 두루 경험했다. 내가 처음 디자이너의 업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작은 조직조차 직급이 존재했다. 사원과 주임, 대리, 과장을 거쳐 팀장까지 경험했다. 어느 위치에 있든지 위를 볼 때는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볼 때는 고개를 들어야 하는 이상한 자세를 취했다. 커리어 초기부터 항상 무한 컨펌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고, 신입 때는 선배들의 시안 작업을 위해 누끼만 하루 종일 따다 막차를 타고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렇게 재료 손질만 1년 이상 해야 겨우 불 옆에 설 수 있었다. 언제나 일과 정보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지금은 거의 모든 스타트업을 비롯한 IT 업계는 수평 조직을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힘의 중심은 생기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정보를 유통하며 차익을 챙기고, 누군가는 제한된 공간에서 무언가를 거래한다. 그 순간 힘의 균형은 깨지고 '라인'으로 일컫는 파벌이 생긴다. 진실보다 소설이 더 듣기 좋고, 전파도 빠르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라인' 위에 서있으면 쉽게 지워질 수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몇몇 사람이 세력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는 조직일수록 방향을 잃기가 쉽다. 그 세력이 마치 자기장처럼 동작해 목표한 방향으로의 이동을 방해한다. 그러한 조직에서 곧은 바위는 깨지기 마련이다. 오히려 자갈들은 고인 물아래 편안한 폭포수 소리를 즐기며 유유자적할 수 있다. 자갈과 자갈 사이의 얇은 끈들로 이어진 그들만의 호수를 만들고, 그 위에 언제든 부서질 것 같은 작은 배 하나를 띄워 둔다. 떨어지는 폭포의 파장이 배를 흔들 때마다, 곧은 바위가 호수를 시끄럽게 한다며 몰아세운다.


 그런 지리한 싸움에 지쳤다. 더군다나 구직의 시점이 나도 내가 무엇을 만드는지 모를 환각에서 막 깨어난 때다. 수십 개의 JD를 한 자 한 자 마침표까지 꼼꼼하게 읽었다. 그러다 더기프팅컴퍼니를 만나게 되었다.


"정보의 격차로 인해 권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기프팅팀 소개 글에는 중고나라의 사기 글에서나 볼 법한 회사 문화를 앞세웠다. 과연 조직에서 정보의 격차가 정말 없을 수 있을까. 아무리 수평 조직을 지향하는 조직에서도 수평의 축에 따라 격차는 생길 수밖에 없다. 피라미드도 위에서 바라보면 수평이다.


 좀 더 회사를 알고 싶었지만 정보가 전무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점이 그것의 신뢰를 높였다. 포장에 열을 가해 겉만 뜨거운 곳은 아니겠구나.


 지금의 대표가 나에게 인터뷰 자리에서 ‘정보의 독점을 막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 한마디에 입사를 결정했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그것도 에자일을 지향한다는 스타트업에서도 실세는 존재한다. 그곳에서 실세는 그야말로 계주가 된다. 그 사람이 속하지 않으면 회식도 미룬다. 대표는 그런 본인의 경험을 열을 다해 이야기해주었고, 나는 그 이야기에 십분 공감하며 함께하게 되었다.


  제러미 하이먼스와 헨리 팀스는 함께 집필한 책 ‘뉴파워’에서 참여, 공유, 투명성으로 연결되는 신권력의 시대가 왔다고 제시했다. 지금까지의 구권력에서는 권력은 화폐와도 같았다고 한다. 한정된 양을 일부의 사람들이 독식하고 있으며, 누구나 한번 손에 쥐면 놓기 싫어한다. 하지만 이제 철저한 투명성과 끊임없는 피드백이 바탕이 된 신권력의 시대가 왔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대표의 설명은 거짓이 없었고, 모두가 벽이 없는 룰 안에서 각자 치열하다. 더기프팅컴퍼니는 '뉴파워'에서 주장하는 '투명성'과 '피드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모두가 진행 중인 모든 업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Quip과 Slack은 위 중요한 두 가지 가치를 실현하는데 매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진행하는 모든 업무는 팀원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개 상태로 문서를 작성한다. 그 안에서 관련 논의가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이전에 Notion을 통해 공개 문서로 업무 내용을 나눈 적은 있지만, 모든 업무 내용이 공유되는 환경은 처음이다. 회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투명한 업무 환경이다.


 회사 내 개인적으로 주고받는 DM도 금지되어 있다. 심지어 'Jaden, 점심 7,000원 아래 계좌로 주세요'까지 슬랙의 공개 채널에 이야기한다. 그만큼 철저하게 투명하고, 작은 정보도 모두에게 열려 있어서 누구나 참여하고 의견을 남길 수 있다.


 나는 '신권력'을 실험하고 있는 이 팀에서 ‘월간가슴’과 더불어 여성 속옷을 판매하는 ‘인더웨어’를 운영/디자인하고 있다. 이제는 지하철에서도 ‘인더웨어’를 열어 확인하는 것도 일상이 됐다. 물론 남자가 지하철에서 여성 속옷을 훑어보는 것에 꼴사나운 시선이 따르긴 한다. 그래서 아주 잘 보아야 하는데, 이제는 우리 사이트를 ‘잘 훑어보는’ 노하우도 생긴 것 같다. 

 

 



더기프팅컴퍼니는 좋은 분들을 모시기 위해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365-a0c5d042dcf54516bc7de34610cf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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