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빌니우스 여행기 수필
세상 사람 모두는 자신만의 파워가 있다. 그 파워들 중에서도 가장 힘이 쎈 슈퍼파워는 보통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남에게든, 본인 자신에게든. 누구는 총알만큼 빠른 달리기 실력을, 누구는 생각해낼 수 조차 없는 음악 조화를, 누구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나도 누구나처럼 이런 슈퍼파워가 있다. 바로 '전자기기 한정. 만지면 다 뿌셔요!'
난 전자기기를 잘 다루지 않고, 좋아하지 않고, 끼고 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월에 뒤쳐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내 취향이다. 물론 '만지면 다 뿌셔요'가 날 이렇게 만드는데 크게 한몫 거들긴 했지만.
에스토니아에서 3년 2개월 살며 고장 낸 전자기기가 시간순으로 1. 반자동 필름 카메라, 2. 노트북, 3. 핸드폰(아이폰), 4. 핸드폰(블랙베리), 5. 핸드폰(삼성), 6. 아이팟, 7. 대용량 외장하드, 8. 8기가 용량 꽉 찬 카메라 사진 칩 두 개, 9. 디지털카메라 충전기
그냥 파워가 아니다. 이건 슈퍼파워다.
이전에 디카가 있긴 했지만 잃어버렸다. 그리고 난 보통 필름 카메라를 쓴다. 하지만 에스토니아 생활 초기, 망가트리고 말았다. 만지면 다 뿌셔요! 가 또 화려하게 빛을 내는 순간이었다. 물론 카메라는 1990년대에 출시되었고 아빠가 쓰던걸 물려주신 거라 거의 20년이 다 돼가는 상태였긴 했지만. 근데 망가뜨렸다. 그 이전 한국에서 뽈뽈 돌아다니며 사진 찍을 때는 그렇게 멀쩡하더니. 에스토니아의 첫 사진을 찍으려고 한 순간. 그 의미 있는 순간을 그렇게 뿌셔버리다니. 괜한 배신감이 들었다.
지금은 부품이 없어 고칠 수가 없다는 서비스센터의 사망선고에 내 서랍에 고이 잠든 필름 카메라는 색감이 굉장히 좋다. 어마어마하게 좋다. 미놀타 제품이다. 아빠가 물려주시면서 이거 사진 기가 막히게 찍힌다고 하셨을 때 이렇게 투박하고 오래된 게 잘 찍힐까 하고 반신반의했지만 와우. 시험용으로 찍은 동네 사진을 보고 박수가 절로 나왔다.
그러다 보니 탈린에서 급하게 산 199유로짜리 디카는 내 기준으로 봤을 때 화질이 안 좋다. 돈을 들일까 했지만 애초부터 디카는 사용하지 않아, 차라리 그 돈 모아 필름 카메라를 새로 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름 카메라는 따로 사지 않았고, 그냥 그 디카로 찍고 다녔다. 그래서 리가에서부터 화면에 나오는 결과물을 보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진 보정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 아니었다. 물론 '느낌 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 가져간 로모카메라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해가 없어 노출을 오래 했어야 했는데 카메라를 가만히 잡고 있기엔 추위에 너무 심하게 떨고 있었다.
게다가 로모카메라의 기본 색감이 어두운 초록색이라 괜히 찍었다간 필름만 낭비할 것 같았다. 유럽은 기본 필름값이 한국보다 더 비싸고 400이나 800짜리는 전문점을 제외하곤 쉽게 찾을 수도 없다. 괜한 시간이나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199유로 카메라는 줌 기능이 아주 좋지만 기본적으로 선명도가 낮다. 이 낮은 선명도는 구름이 많이 끼면 상태가 심각해질 정도다. 그리고 밝기 조절에 버그가 생긴다. 명암이 난감해질 정도다. 이번 여행기 첫 번째 사진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수동으로 해도 안 된다. 아니면 내가 못 했다거나.
어쨌든 이 글을 쓰면서 보정한 사진과 원본 사진을 두고 한참 생각했다. 리가는 이전에 찍어둔 사진이 많았지만 빌니우스는 처음 갔기에. 과연, 조금 더 선명하고 뭔가 예술적인(?) 색감이 들어간 보정 사진이 좋을까, 아니면 칙칙하고 눅눅하고 선명도가 낮은 원본 사진이 좋을까.
얘기가 또 이상한 삼천포로 빠져 길어졌다. 결론은 아무래도 색감을 살려 조금 더 예쁜 사진을 보여주는 것보단, 그 당시 내가 실제로 마주했던 여행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이 여행기 시리즈에는 원본 사진을 추가했다는 것이다.
진짜 여행기는 지금부터다.
빌니우스는 엄청 크다. 휴가를 떠나기 전, 동료들에게 크다는 얘긴 듣긴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크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난 타르투에서 살다가 리가를 거쳐 빌니우스로 갔기 때문에 내겐 훨씬 더 크게 느껴졌을 수 있다. 타르투는 엄청 작다.
리가 출발 빌니우스 도착 Lux Express 라인을 탔는데 시내 중심에서 한 번 정차하는 바람에 잘못 내릴 뻔했다. 내 바로 앞자리 독일 학생으로 추정되는 젊은 두 청년이 아니었다면.
보통 룩스익스프레스는 비행기처럼 각 좌석에 화면이 달려있다. 그리고 현재 차량을 GPS로 추적해서 여행객들에게 가장 중요한 현재 위치와 이번 정류장, 다음 정류장까지 남은 킬로수, 시간을 알려주고, 영화나 드라마, 음악, 인터넷 등 제공하는 서비스가 많다. 커피 기계도 있어서 커피나 코코아도 뽑아먹을 수 있다. 무료로. 장거리인 경우는 물과 이어폰을 제공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탔던 버스는 GPS 기능이 없었다. 현재 위치가 계속 화면에 잡히지 않았다. 아뿔싸.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기에 난감했다. 여행 전 내려야 할 곳을 지도로 슬쩍 보기만 했는데. 지도 상의 위치와 거리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난 다음 정류장이 또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스가 멈추고 차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도착한 줄 알고 짐 챙기며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반 도시처럼 현대식 건물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다 내 앞자리 청년 둘이 여기가 올드타운 버스정류장이 맞냐고 내리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다음 정류장이란다. 맙소사. 큰일 날 뻔했다. 시내 중심인 줄 알았는데. 그냥 짐만 싸고 내릴 계획은 없었던 척 다릴 꼬고 앉았다. 올드타운 정류장까지 한참을 달렸다.
올드타운 버스정류장은 시골 버스정류장처럼 생겼다. 혹시나 잘못 알려준 건가 라는 생각이 들만큼. 한 나라 수도의 가장 중심 관광지 버스정류장이 이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방향이 올드타운인지 표지판 하나 없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난 생각 없이 사람들이 많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주변 경관을 보고 도저히 이 길은 아니다 싶어 다시 돌아갔다. 어디 산으로 가는 건가 싶었다. 몇 번을 둘러보고 찾아낸 버스정류장 건물 안 안내소에서 길을 묻고 지도를 받아 챙겼다. 정 반대방향이었다. 멍청한 거 티 낼 뻔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어 너무 추웠고 그저 빨리 씻고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컸다. 리가에서 맞은 비가 타격이 컸다. 손 발이 얼어버릴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느긋하게 나갔다. 겉옷을 살까 했지만 겨울 옷 파는 곳을 못 찾았다. 올드타운엔 자라나 망고 같은 스파 옷가게가 없는 것 같았다. 배가 너무 고파 몸이 벌벌 떨리고 비가 내려도 이왕 나온 김에 여행 온 기분을 내고 싶어 테라스에 앉았다. 하지만 바로 일어났다. 냄새가 너무 심했다. 그대로 스테이크 썰다간 내 코까지 썰고 싶을게 분명했다. 내 정신력은 이런 냄새를 이길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비와 추위에 지고 있었고, 감기 기운도 슬금슬금 다가오는 와중에 이젠 냄새 공격까지. 도대체 왜 이러나. 다음엔 뭐가 되려고.
너무 드라마틱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도 않다. 이 여행기엔 안 좋은 일을 겪었던 건 굳이 적지 않았고, 않고 있으니. 나쁜 거 얘기해서 뭐 하나. 그럴 필요가 없는데. 내 경험이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타인의 결정에 장애물이 된다면 씁쓸할게 분명하다. 그래도 뭐, 또 굳이 예를 들자면. 리가에서 젊은 캐셔가 내 돈 떼먹으려고 대놓고 잔돈 15유로나(!) 덜 바꿔줬다던가 하는. 뭐, 그런. 어쨌든 이번 여행의 느낌이 싸했다.
식당 근처엔 담배냄새, 노상방뇨 냄새, 식당에서 나오는 냄새, 퀴퀴한 냄새, 땀 냄새, 정체모를 냄새들이 한데 모여 공기가 더럽게 무거운 비 오는 날 자신의 정체성을 너무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각자 개성이 너무 뚜렷했다. 섞이지도 않았다.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추위고 비고 바람이고 뭐고는 숨을 들이쉰 순간 더 이상 신경 쓰이지도 않게 되었다.
하지만 스테이크를 먹고 나서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스테이크가 너무너무너무 맛있었다. 난 역시 간사했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호스텔에서 '진짜 전통 음식점'이라고 추천받고 간 곳이라 영어 메뉴도 없어서 그냥 사진 보고 시켰는데 대박이었다.
스테이크와 함께 나온 리투아니아식 전통 통마늘구이(라고 종업원이 설명해줬다)가 정말 맛있었다. 통마늘을 껍질 채 엄청 새카맣게 구워(태워) 냈는데 사실 처음엔 이거 먹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먹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걱정했다.
핀란드 젤리로 기억하는 흑마늘 젤리를 예전에 사무실에서 받아먹다가 그 맛의 충격에 한동안 마늘을 멀리했었는데. 혹시라도 같은 맛일까 봐 두려웠다. 찝찝했다. 괜히 시킨 건가. 그나마 지금 시킨 게 사진상 감자가 좀 덜 있어서 시킨 건데. 사진엔 맛있는 갈색인데 왜 내겐 시커면 목탄을 준건지. 당장 집어 들어 소묘를 시작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갑자기 속에서 들끓는 미술 욕구를 억누르느라 힘들었다. 조리가 잘 못된 건가? 색감이 예사롭지 않은데. 명암은 잘 나오겠군. 물어봐야 하나? 만약 내가 생각하는 맛이라면 어쩌나?
사무실 주방에서 커피 타는데 옆에서 젤리 먹으라고 뭔 시커먼 걸 쥐어주길래 이번 콜라맛 젤리는 좀 더 까맣네 하고, 이게 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입으로 넣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사장님이 단맛을 좋아하셔서 사무실에 사탕, 초콜릿, 젤리, 과자가 많이 돌아다녔었다. 그래서 그전에 비슷한 색의 콜라맛 젤리를 먹어본 적이 있어 당연히 같은 계열(?) 일 줄 알았다.
입안이 씁쓸해졌다. 하. 밥상 앞에서 별 시답잖은 걱정을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그때 먹은. 도대체 무슨 맛인지 설명도 못하겠는 흑마늘 젤리의 타격이 너무 컸다.
고갤 들어 레스토랑을 둘러봤다. 여행객들인지 현지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다들 너무 웃으면서 맛있게 먹길래 용기를 냈다. 그래서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불끈지고, 나이프와 포크를 바로 잡고 힘 있게 껍질을 까고, 당당하게 움직였다. 물론 눈동자를 굴려 가장 가까운 휴지의 위치도 확인했다.
이왕 온 거, 그냥 갈 순 없지 않은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그래서 썰었다. 눈꼽만큼. 난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특히 음식 앞에선. 체질상 못 먹는 게 많고 알레르기도 있는 데다 몸 상태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음식도 가려야 한다. 회식이나 친구들과 밥 먹는 게 종종 힘들 때도 있지만 여기서 가장 짜증 나는 사람은 나 본인이다. 나도 먹고 싶은데 어쩌겠는가. 내 몸님께서 그러라시는데.
그런데 !!! 맙소사 !!! 진짜 맛있었다 !!!! 그 망할 젤리가 내 시야를 너무 가로막고 있었다 !!! 역시 경험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경험을 만든다. 지금도 그리운 맛이다. 여행 후 타르투로 돌아와서 당시 살던 집 굴뚝에 불 피우면서 만들어먹으려고 시도하다 실패로 끝난 게 도대체 몇 번이던가. 아. 그리운 음식이여.
메인은 성공이다. 하지만 황송하게도 얼음까지 띄워준 오렌지 주스는 다 마시지 못했다. 한 모금 마셨는데 이가 시린 건 그냥 내 착각이겠지. 내장까지 추워지는 기분은 그냥 내 착각이겠지. 손 끝이 떨리면서 하얘지는 것 기분은 그냥 내 착각이겠지. 턱이 좀 떨리고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그것 역시 그냥 내 착각이겠지. 아, 여기 사람들 사람들 지금 이 날씨에 반팔에 반바지 입던데. 그것도 역시 그냥 내 착각이겠지. 박경림이 부릅니다. 착각의_늪.mp3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따뜻한 와인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없어서 그냥 차를 곁들였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맛있는 아점을 먹고 어딜 갈까, 지도를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감기 기운이 몸을 감싸고 있었고 내 곁에 꼭 붙어 떠나려 하지 않았기에 올드타운 전체를 둘러볼 수 없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구름이 몰려와 더 어두컴컴해지기 전에 전망대에 가서 시대를 한번 내려다보며 크기를 가늠하는 게 좋겠다 판단했다.
물론 그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스스로를 칭찬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빌니우스는 엄청 크고, 붉고, 에스토니아나 라트비아에서 느껴지는 발트 3국 특유의 중세시대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남유럽 느낌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리투아니아 특유의 좀 건조한(?) 느낌이 있었다. 비가 적적하게 내리는데도 도시가 생각보다 건조했다. 물론 올드타운으로 들어가면 발트 특유의 분위기가 나긴 하지만 중세시대 느낌이 전혀 없다. 조금 더 구소련 느낌의 딱딱한 동유럽 같았다.
카메라로 관광지를 줌인하면서 지도로 확인했다. 최대한 짧은 동선으로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관광지가 도시 전체적으로 넓게 분포되어 있어 버스나 자전거를 타야 할 것 같았다. 전체를 한번 훑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바로 포기했다. 너무 추웠고, 몸이 안 좋았던 데다가 카우나스와 바르샤바가 남았기에 썩 좋은 생각은 아닐 듯싶었다.
올드타운만 짧게 둘러보기로 결정하고 출발했다. 전망대에서 아주 가까웠던 대성당 광장에선 일본인 열네다섯 명 정도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공연 중이었다. 다른 나라 국기들도 많이 보여 다음 참가팀을 기다렸지만 천막이 철거하는 걸로 보아 행사가 끝난 듯싶었다. 아쉽긴 했지만 리투아니아와 크게 관련 없는 행사인 것 같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아쉽지도 않았다.
대성당 주변을 배회하다가 지도를 접고 발 가는 데로 움직이기로 마음을 바꿨다. 애초부터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골목골목이 너무 예쁘고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날 겁주던 버스정류장의 오래된 시설과 올드타운 일부 지역에서 나던 이상한 냄새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정처 없이 떠돌다 내부 벽 전체가 책으로 가득 찬 카페를 찾았다. 대부분 리투아니아어로 된 책이었지만 아이들 동화책은 글보다 그림이 많아서 내용을 추리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이상한 만화책도 있었고 영어로 된 책이나 에스토니아어로 된 책도 있었다. 물론 다른 언어도 있었겠지만 내가 구분할 수 있는 언어는 이 정도기에 다른 나라 책이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모르겠다.
카페에서 좀 쉬며 책을 읽다 커피로 몸을 데우고 다시 출발했다. 지도도 확인하지 않고 다시 발길 닿는 데로 걸었다. 개성 있는 카페, 미용실, 레스토랑, 옷가게, 중고샵이 등등이 엄청 많았다. 첫인상이 너무 건조해서 걱정 아닌 걱정하고 있었는데, 알맹이를 까 보니 전혀 건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채로웠다. 지붕은 그저 붉기만 한데 건물 벽은 밝은 색 계열이나 파스텔 톤 건물이 많아 알록달록했다. 리가보다 좀 더. 에스토니아는 건물 벽이 누렁누렁하게 엄청 무미건조한데!
그중 눈에 띄는 두 중고샵에 들렀지만 살만한 게 없어 아쉬웠다. 지금 당장 입을만한 코트나 LP 같은걸 구하고 싶었는데 내 취향에 맞는 건 없었다. 뭐라도 좀 건질 수 있을까 했는데. 진짜 아쉬웠다.
어떻게 뱅글뱅글 돌고 돌아 숙소 근처로 돌아와 버렸다. 전망대에서 봤던 거랑은 다르게 작은가 보다 했는데 지도를 확인해 보니 다섯 시간이 조금 넘을 동안 올드타운의 일부분만 돌아다녔더라. 내가 걸음이 느린 편이긴 하지만, 새삼 이 도시가 크다는 걸 다시 느꼈다.
별로 한 게 없는데 춥고 많이 걸어서인지 쓸데없이 배가 고팠다. 난 감자를 정말 안 좋아하는데 이쪽 나라에선 감자가 주식이라 지긋지긋했다. 이번엔 일반 피자집을 택했다. 사실 아점 먹을 때 스테이크와 같이 나온 감자를 먹을까 말까 하다가, 그래도 탄수화물은 필요할 것 같아 억지로 먹어서 저녁만큼은 감잘 먹고 싶지 않았다. 난 감자를 정말 안 좋아한다. 정말. 고구마는 킬런데.
저녁을 먹고 나와 좀 걸었다. 피자 한판은 아직도 다 먹을 수 없다. 절반이나 남겼는데도 속이 더부룩했다. 여전히 추웠지만 동네 마실 나가듯 조금이라도 걸어야지 속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비가 너무 많이 쏟아지기 시작해 숙소로 돌아왔다. 우비를 사둬서 다행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카우나스행 기차를 타야 해서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일기 쓰고 있는데 호스텔 밑, 1층 카페에서 젊은이들이 단체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기타 소리와 이름 모를 악기들이 맑은 목소리에 맞춰 청량하게 울렸다. 목소리에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빗소리를 뚫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눅눅한 공기와 함께 스며들고 있었다. 가져간 시집과 너무 잘 맞는 라이브 배경음악이었다. 한참 뒤 비가 멈추자 소리가 더 커졌다. 사람들의 박수소리까지 들리는 걸로 보아 관광객들이 다시 길거리로 나온 듯싶었다. 나도 살짝 나가 구경했다. 카페 옆에 바로 붙어 있는 아이스크림가게에서 초코칩 민트맛도 하나 땡겨줬다. 아무리 춥고 감기 기운이 오고 아플 것 같아도 아이스크림은 약이다. 절대 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너무 아쉽다. 지도에 보면 올드타운보다는 외곽에 볼거리가 더 많은 것 같던데, 빌니우스는 다시 한번 날 잡고 와야겠다 다짐하며 하루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