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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밤이 Jul 19. 2024

프라이팬 수세미와 고추참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 주는 것

올해 2월 이사를 했으니 독립 한지 약 5개월이 지났다. 근처에 있는 친구들은 편하게 초대할 수 있어 대부분 집들이를 마쳤다. 그러나 서울의 서쪽인 강서구에 사는 나와 달리 경기도 양주와 광진구에 사는 대학 친구들은 거리도 멀고 모두 가정이 있다 보니 일정 잡기가 어려워 초대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4명의 멤버로 구성된 우리는 같은 과 동기 3명과 한 학년 후배 1명으로 각자 이름의 약자를 따 YESJ(예스제이)라 부르며 2007년부터 서로를 바라봐주고 있다.


어느 날 E는 내가 어떤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며 SNS에 예쁜 옷을 입고 사진을 올렸는데 꿈인지 진짜인지 물어본다며 연락을 하게 됐다. 얘기하다 보니 서로 안 본 지 오래된 것 같다며 이참에 만날 날을 잡기로 해 친구들과의 대화방으로 이야기를 옮겨 갔다. 다행히 평일 오후에 시간을 만들 수 있어 이른 저녁을 집들이 겸 우리 집에서 먹기로 했다.


금세 며칠이 흘러 약속된 날짜가 되었고 친구들에게 토마토오이 샐러드를 만들고 무버섯솥밥을 위해 불려놓은 쌀을 버터에 볶는 찰나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들의 양손에는 뭔가를 잔뜩 담은 묵직한 종량제 봉투와 장바구니, 휴지, 세제가 들려있었다. 볶고 있던 쌀이 탈까 봐 나는 친구들을 정신없이 집안으로 들이고 가져온 봉투와 장바구니는 열지 못한 채 안쪽으로 들인 후 쌀에 물을 붓고 솥밥을 마무리했다.


집들이를 하면 요즘에는 시켜 먹는 경우가 많은데,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준 음식을 먹기 힘들 것 같아 음식은 내 손으로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행히 친구들은 음식들을 잘 먹어주었고 요리로 표현한 내 마음도 친구들의 마음속으로  전달된 것만 같았다.


지우고 싶은 흑역사는 뭐야?
살면서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야?


우리는 디저트로 준비한 펑리수를 먹으면서 질문카드로 대화를 이어갔다. 일전에 글을 배우는 곳에서 발견한 아이템이었는데 서로를 알아가기 좋은 도구여서 세 가지 버전(인생, 친구, 일상)을 사두었었다. 마냥 어색해하며 첫 질문을 시작했지만 우리는 금세 적응하며 17년을 함께 해왔던 사이임에도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알아갔다.

 

몇 개의 질문카드로도 이야기는 끊임없었다. 아직도 많이 남은 질문카드는 다음을 기약하며 밤에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에 서둘러 갈 채비를 하고 우리집을 나섰다. 아파트 주차장까지 배웅하고 돌아와 집을 정리하며 친구들의 양손에 붙들려 있었던 종량제 봉투를 열었다.


프라이팬 수세미, 고추참치, 스팸, 다목적 세정티슈, 비데티슈, 손세정제, 주방세제


프라이팬용 수세미가 있었구나.

그냥 참치가 아니라 고추참치를 사 왔네.


친구들은 종량제봉투에 내가 모르던 프라이팬용 수세미를, 주방부터 화장실과 책상까지 사용가능한 다목적 세정티슈를 담았다. 자취생은 일반참치 통조림 정도는 있을 테니 고추참치를, 자주 먹는 스팸은 한 묶음 더, 월세집에 비데가 없을 수 있으니 비데티슈를, 가장 자주 닳아 없어질 손세정제와 주방세제는 두 개 씩 넣었다.


음식청소에 취약한 자취생인 나를 생각한 섬세한 선물들이었다. 친구들의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함을 넘어 넘치게 사랑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정리한 물건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입꼬리는 올라가고 눈동자에서는 애정 어린 거미줄이 촘촘하게 엮여나갔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아주는 것,

내가 필요한 걸 생각해 주는 것,

질문에 솔직해져도 부끄럽지 않은 것,

여전히 궁금하고 미래가 기대되는 것.


오늘만큼은 우정이 뭔지 알 것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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