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선을 긋고는 사라진다.선은 둥글게 원을 만들고 있다. 그어진선안으로 서류가방을 든 남자가 들어와 가방을 의자 삼아 앉아 신문을 펼친다. 그 뒤로 여자가 선 안으로 들어오고, 나무를 든 청년과 결혼한 신혼부부, 박스를 든 청년, 강아지와 산책 중인 노년의 여인, 아들을 데리고 온 남자까지 모두 원 안에서 멈춘다. 잠시 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나갔던 아이가 되돌아와 함께 원 안에 선다.
선을 그은 소녀가 돌아온다. 그었던 선을 신발로 쓱싹거리며 지운다. 사람들을 감싸던 원은 사라진다. 사라진 원 안의 사람들은 잠시 당황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발걸음과 속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내 흩어진다.
끝으로 새가 잠시 원 위에 내려앉는다. 잠시 쉬고 난 후 날갯짓을 하며 날아간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준들에 흔들리면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는 변명만 늘어놓게 된다. 내 삶의 주체는 누군가 그려놓은 서클인가? 내가 원하는 어떤 것들을 찾아보기도 전에 누군가 그려놓은 원이 어느새 밧줄처럼 내 발목을 잡아버렸다. 그리곤 내 삶도, 주변인의 삶도 좁디좁은 원 안에서만 행해진다.
발목을 붙잡은 밧줄을 풀 수 있는 건 오직 내 두 손뿐. 풀어진 밧줄 위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두 발뿐.
타인의 밧줄에 묶여 나의 욕구와 삶의 방향을 잃지 않기를.잠시 머물다가는 작은 새처럼 사는 삶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