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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Feb 23. 2021

삶을 버텨내는 한 소녀의 여정, <바람의 목소리>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바람의 목소리> (風の電話, 2020)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에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고, 일본 열도는 엄청난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찼다. 이후 몇몇 감독이 이와 유관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2011), 나오 쿠보타 감독의 <집으로 간다>(2014), 아라이 하루히코 감독의 <분화구의 두 사람>(2019) 등이 있다. 그러나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바람의 목소리>는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공개되기까지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이면에는 연출자로서의 고민과 평범한 개인으로서의 고민이 뒤엉켰을 테다. 전자의 고민은 동일본대지진 이후 감독 본인의 내면, 가치관 변화 등을 카메라로 어떻게 표현할지에 관한 고뇌일 테다. 쉽게 말하자면 스와 노부히로 감독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카메라에 담고 편집으로 이어 붙이는, 즉 무언가를 전시하는 일에 그치는 기계적인 영화를 만드는 걸 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후자의 고민은 현실을 애정하는 개인으로서 대재앙 때문에 무너진 세상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려는 자세와 관련이 있다.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은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위로를 주고받는 심적인 여유가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그곳 대재앙의 역사를 접했던 스와 노부히로 감독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을뿐더러, 복구 작업 덕분에 외관상 어느 정도 일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동일본대지진 피해 현장의 현상(現狀)을 통찰했을 테다. 이와 같은 고민들 때문에 <바람의 목소리>의 제작을 준비하고 완성하기까지 스와 노부히로 감독에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 걸로 생각한다.



로드 무비의 형식을 빌린 <바람의 목소리>는 히로시마에서 출발해 이와테현 오츠치로 향하는 17세 소녀 하루의 여정에 관한 영화이다. 로드 무비의 거장인 빔 벤더스 감독의 작품들 혹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1991)를 반추하면, 로드 무비의 보편적인 정의는 특정 인물이 여러 장소를 경유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에피소드를 통해 무언가를 깨닫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이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로드 무비는 개인적 인간의 영역에 속한 영화 갈래이다. 그렇지만 <바람의 목소리>는 하루의 시점에서 개인적인 슬픔, 국가적 재난, 고국을 잃어버린 쿠르드족 난민의 이야기 등을 동등한 층서(層序)에서 살펴보므로 역사적 인간의 영역에 해당하는 로드 무비라고 봐야 한다. 2011년 당시 9세였던 하루는 쓰나미로 부모님과 남동생을 잃어 혼자가 되었고, 오츠치를 떠나 히로시마에서 숙모 히로코(와타나베 마키코)와 단둘이 지내왔다. 17세가 되던 해 어느 날 히로코는 하루에게 같이 오츠치를 방문하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이에 하루는 미약한 고갯짓으로 답변한다. 왜냐하면 오츠치는 더는 따뜻함이 아닌 죄책감과 분노가 혼재한 고향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하루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을 버티는 것만으로 매우 버겁다. 그런데 하교 후 귀가하니 숙모가 의식 불명인 채 쓰러져 있었고, 단 하나뿐인 보호자가 입원하자 하루는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었다. 너무나 괴로운 하루는 산속에 있는 공사판에서 발버둥을 치듯 울부짖다가 지친 나머지 쓰러져 눕는다. 이때 클로즈업에서 롱 숏으로 전환되고, 프레임 안에 증가한 여백이 인물의 고독감을 환기한다. 이는 삶을 견뎌내는 걸 포기하기 직전까지 도달한 하루의 상태를 암시한다. 그런데 봉고차를 몰고 지나가던 아저씨 코헤이(미우라 토모카즈)가 우연히 하루를 발견한다. 하루는 최대한 빨리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 했으나 계속 침묵을 지키자 코헤이는 급한 대로 하루를 본인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코헤이의 집에 할머니께서 계신다. 할머니는 부엌에 있는 하루의 옆에 다가와 6세였을 때 일어났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사건을 소환한다. 할머니는 그때 친척이 세상을 떠났는데 추모하기는커녕 친척의 뼈를 보지 못해 실망했던 유년 시절의 자신을 아직도 용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할머니의 고백은 1945년의 히로시마와 2011년의 후쿠오카와 오츠치가 원폭 피해 역사로 이어졌음을 강조하고, 할머니의 후회와 하루의 고독을 하나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음을 환기한다. 그 순간 코헤이는 하루에게 저녁 식사를 차려주며 “살아있으면 먹어야 돼”라고 말한다. 이는 근심을 잠깐 잊고 포만감을 느끼자는 의미가 아니다. “살아있으면 먹어야 돼”는 이승에 돌아올 수 없는 자들을 기억하려면 살아있는 자라도 무언가를 먹으며 이 삶을 견뎌내야 한다는 위안의 한마디이다. 이에 덧붙여 작별 인사를 하기 전, 기차역 앞에서 코헤이가 하루에게 귤을 선물하는 장면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하루는 코헤이의 진심 어린 말 한마디와 배려에 굳게 잠갔던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루는 돌아가지 못했던 고향에 홀로 다녀오기로 결심한다. 다음날 어딘가에 내린 하루는 히치하이크를 시도하다가 아빠가 사라진 아이를 밴 43세 유우카(미라이 야마모토)와 그녀의 남동생을 만난다. 유우카의 남동생은 미성년자인 하루를 걱정할 보호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경찰서에 인계해주자고 말하지만, 유우카는 일단 밥을 먹이자며 하루를 식당으로 데려간다. 유우카와 그녀의 동생은 하루에게 반찬과 음식을 덜어주며 자상하고 살뜰히 챙긴다. 아울러 두 사람은 하루의 작은 목소리와 미세한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며 집중한다. 행여나 하루가 침묵을 지키더라도 두 사람은 하루가 편안히 있길 바라며 그 상황을 억지로 깨지 않는다. 식사에 담긴 의미에 두 사람의 배려가 더해지며 하루는 오래도록 자신을 집어삼켰던 결핍을 잠깐이나마 잊는다. 식사 중에 아기의 태동을 느낀 유우카는 하루에게 자기 배를 만져봐도 괜찮다고 말한다. 곧 태어날 생명에게 인사하며 신비로워하는 하루를 바라보던 유우카는 아이의 아빠가 도망쳐 두려운 적이 있었지만, 배 속에 있는 아기 덕분에 살아있음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계획해 보는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여태껏 죽음의 기운에 감싸였던 하루는 두 번째 선인 덕분에 결핍에 가려졌던 생명감을 상기하고, 더 나아가 처음으로 본인의 미래를 연상해 본다.



어두운 밤 전철역 앞에서 빵을 먹던 하루는 갑자기 젊은 남성 무리로부터 납치 위협을 받는다. 그때 주차장을 빠져나오던 모리오(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등장한다. 모리오는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이곳저곳을 떠돌며 차 안에서 생활하고 임시고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하루를 위기에서 구하고 안전한 데에 내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그새 잠이 들었고, 모리오는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데리고 과거 후쿠시마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쿠르드인 남성을 찾아 나선다. 두 사람은 그 남성이 종종 방문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식당을 찾아가지만 끝내 만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쿠르드인 남성은 난민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 현재 출입국관리소에 구금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리오와 하루는 우연히 그 남성의 가족을 대면한다. 쿠르드족 가족은 고국 없이 살아가야 하는 고통을 토로하고, 모리오와 하루도 각자의 상처를 이야기하며 서로의 상처를 나누고 보듬는다. 스와 노부히로 감독은 이들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현장을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접근한다. 르포르타주 형식은 현장을 짧은 컷이 아닌 긴 컷으로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생동감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바람의 목소리>에서는 하루와 모리오의 고독감, 후쿠시마의 역사, 고국을 잃어버린 쿠르드족의 역사를 동일한 층위에서 관망하도록 돕는다. 이와 같은 특징은 <바람의 목소리>가 기본적으로 일본 대재앙의 역사를 다루는 작품이지만, 잃어가는 기억과 잃어버린 풍경, 그리고 그로 인한 번뇌를 범세계적으로 살피고 이해하려는 감독의 가치관에서 파생된 것이다. 쿠르드족 가족과의 만남을 뒤로한 채 모리오와 하루는 다시 차에 탑승한다. 그런데 모리오가 하루에게 가족사진을 보여줄 수 있냐고 갑작스레 묻는다. 이에 하루는 모리오에게 사진을 건넸고, 어느새 그의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맺혔다. 스와 노부히로 감독은 이 감정적인 장면에서 ‘숏–리버스 숏’이라는 정석적인 영화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숏–리버스 숏’은 두 인물 간의 대화 장면에서 활용되며, 감정과 대사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상호 작용을 일으킨다. 그러나 스와 노부히로 감독은 모리오가 느끼는 슬픔과 결핍이 하루의 감정과 동등하게 이해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숏–리버스 숏’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두 인물을 나란히 볼 수 있는 평면적인 투 숏을 고집한다. 게다가, 스와 노부히로 감독에게 관습적인 영화 언어는 목표하는 감정을 지나치게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인위적인 장치이다. 그래서 <바람의 목소리>에서 ‘숏–리버스 숏’으로 쌓은 감정은 비가시적인 것을 위에서 언급한 연출자로서의 고민에 위배되는 것이자, 고향에 귀환하지 못한 자들을 위한 전례(典禮)에 진실하지 못하는 접근법이다. 애써 눈물을 삼킨 모리오는 오랫동안 가지 않았던 후쿠시마에 있는 집에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후쿠시마 초입에 이르자 차 안만을 비췄던 카메라는 차량 밖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이 순간 카메라가 포착한 풍경에는 기이한 기운이 감돈다. 후쿠시마 원전이 바로 눈에 들어온 점도 있겠지만, 정비된 마을에 새 건물이 세워졌음에도 고향으로 귀환한 원주민의 비율이 낮아 주민을 찾기 힘든 풍경이 만들어낸 이질감과 유관할 테다. 더구나 오랜 기간 관리하지 않아 먼지가 수북이 쌓인 모리오 집의 현재 풍경, 가족과 재회하는 하루의 공상적 숏 등 여러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들이 중첩되면서 그날의 상흔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에도 지울 수 없음을 역설한다. 그러나 모리오는 하루에게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본인이 죽으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기억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모리오의 지인이 두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망자를 기리는 후쿠시마 민요를 부르는 장면도 이와 상통한다.



어느덧 동행인이 된 하루와 모리오는 오츠치까지 일행한다. 8년 만에 찾아간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파여 있었다. 하루는 집터 앞에서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에 울음을 터뜨린 하루는 집터에 드러눕는데, 이 장면은 공사장 한복판에 쓰러져 누웠던 초반부 장면과 오버랩된다. 그러나 세 가지 특징을 고려하면 이번 장면이 이전과 다른 의미를 내포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특징은 오츠치에서 하루가 누운 방향은 히로시마에서 누운 방향과 정반대라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히로시마에서의 장면은 클로즈업 숏에서 롱 숏으로 숏의 사이즈를 전환했다면, 오츠치에서의 장면은 롱 숏에서 클로즈업 숏으로 사이즈를 바꿨다는 점이다. 세 번째 특징은 히로시마에서는 하루가 지친 나머지 의지와 상관없이 쓰러졌지만, 오츠치에서는 하루가 본인의 의지로 누웠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들을 종합한다면 하루는 그리웠던 가족의 기운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받아들여 생의 의지를 회복하려고 집터에 드러누웠다. 연유를 아는 모리오는 하루가 자기 시간을 충분히 보내도록 멀리서 지켜보다가 일으켜 세운다. 이제 각자의 길로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모리오는 앞으로 괜찮을 거라는 말과 함께 하루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히로시마행 기차를 기다리던 하루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전화하려고 나미이타카이간역 근처 언덕에 있는 ‘바람의 전화’라는 곳에 간다고 설명한다. ‘바람의 전화’는 실제 공중전화 부스로, 지금까지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운 마음을 안고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연락하기 위해 다녀갔다고 한다. 소년의 이야기를 들은 하루는 그를 따라 ‘바람의 전화’로 향한다. 그곳에 도착한 하루는 전화기를 들어 부모님에게 지금까지 전하고 싶었지만 전하지 못했던 말과 케케묵은 감정을 표출한다. 스와 노부히로 감독은 하루의 독백을 어떤 미학적인 연출도 없이 고정된 롱테이크 숏으로 찍는다. 이 롱테이크 숏은 하루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쌓은 체험과 두 눈으로 목격한 풍경이 축적되어 완성된 기도의 정점이기에 스와 노부히로 감독은 최소한의 연출만 한 것이다. 표정이 한층 가벼워진 하루는 부스에서 나와 벤치에 앉는다. 그 순간 하늘이 밝아지고 유채꽃의 노란빛이 하루를 에워싼다. 마치 하루의 부모가 자신들을 기억해준 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처럼, 혹은 하루의 진짜 이름 하루카(春香)이듯이 사라졌던 봄의 향기가 되돌아오길 바라는 염원인 것처럼 말이다. 끝으로 <바람의 목소리>는 3.11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일본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했지만, 개인의 상처를 다채로운 역사와 상등한 위상에서 살피려고 노력한 영화이다. 그러므로 <바람의 목소리>가 무력감과 비통함을 안긴 대재앙의 역사 속에서 삶을 견뎌내는 이에게 위로가 되는 영화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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