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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Sep 20. 2021

지구의 끝에서 영화, <최후의 언어>(2020)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 제18회 서울환경영화제 상영작


1826년 세계 최초의 SF 소설가 메리 셸리는 21세기 후반의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한 「최후의 인간」을 집필했다. 「최후의 인간」은 원인과 감염 경로를 파악할 수 없고, 치료법마저 없는 전염병 때문에 꿈과 희망도 없이 인류가 멸망하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이후 「최후의 인간」은 인류 문명이 멸망한 이후의 세계관을 다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 apocalypse) 장르의 원형이 되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현재 게임,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용되므로 대중들에게 친숙한 장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화계만 놓고 보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서사를 차용한 디스토피아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와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28주 후>(2007), <나는 전설이다>(2007),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등이 제작되었다. 최근작으로는 전대미문의 재난이 발생한 지 4년 후의 시점을 다룬 연상호 감독의 <반도>(2020)가 있다. 예시로 든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Post-apocalyptic film)는 환경, 전염병을 비롯한 다양한 재앙 때문에 문명과 기술이 파괴된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와 같은 세계관에서는 윤리와 도덕의 개념이 무너졌다. 게다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과 규범이 부재하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비이성적이고 광신도적인 욕구로 생명을 부지한다. 아울러 범세계적인 네트워크가 무너졌기에 소통과 교감이라곤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전반적으로 톤 다운되어 있다.



그러나 2021년 국내 영화제에서 기존과 다른 결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가 소개됐다. 바로 작년에 코로나19 여파로 물리적 개최를 취소한 칸영화제가 발표한 ‘Official Selection Cannes 2020’에 선정된 조나단 노지터 감독의 <최후의 언어>(2020)다. 닉 놀테, 샬롯 램플링, 스텔란 스카스가드, 그리고 알바 로르와처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최후의 언어>는 생태학적 재앙으로 인해 지구가 생명력을 거의 다해가는 2084년과 2086년 사이에 인류가 보여주는 인간성과 창의성을 그린 예술 영화다. 먼저, <최후의 언어>는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부활한 ‘프론트라인’ 섹션에 초청되며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프론트라인’은 형식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도발적인 시도를 선보인 작품 11편을 소개하는 섹션으로 대중성 및 세련함과 거리가 굉장히 멀다. 특히 <최후의 언어>는 영화 이론과 역사를 향한 오마주를 가미한 상상력으로 세계 멸망 이후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의 삶을 펼쳐내며 독특함의 정점을 찍은 영화로 소개되었다. 그런 다음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최후의 언어>는 제18회 서울환경영화제 ‘폐허를 짓는 동안에’라는 섹션에 초청되며 다시 한번 국내 관객들을 만났다. ‘폐허를 짓는 동안에’는 자본주의라는 파괴적인 체제 아래 환경 파괴에 기여한 인류에 관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섹션으로, <최후의 언어>는 지구가 생명력을 다했을 때 인류에게 남아있을 유산이 무엇일지 생각하게끔 하는 작품으로 알려졌다.



솔직히 조나단 노지터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다. 물론 조나단 노지터는 <선데이>(1997)로 제13회 선댄스영화제에서 2관왕의 영예를 안았고, <몬도비노 – 포도주 전쟁>(2004)으로 제57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 감독이다. 게다가, 그는 <레지던트 에이리언>(1990)과 <내츄럴 레지스탕스>(2014)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을 받으며 본인 작품을 꾸준히 주요 세계 영화제에 소개하는 시네아스트다. <내츄럴 레지스탕스> 이후 조나단 노지터가 내놓은 <최후의 언어>는 시나리오 작가 겸 소설가 산티아고 아미고레나의 동명 소설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됐는데, 설정의 논리성만 따지면 허점이 굉장히 많은 영화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최후의 언어>는 전주국제영화제 ‘프론트라인’ 섹션에 초청된 영화답게 거칠고 무한한 상상력으로 관객들에게 짙은 여운을 남기는 동시에, 서울환경영화제 ‘폐허를 짓는 동안에’ 섹션에 소개된 영화답게 인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자문자답하는 작품이다. 우선, <최후의 언어>는 환경 재앙 때문에 완전히 파괴된 2084년 4월의 파리에서 출발한다. 에펠탑은 당연히 무너졌고 교육, 문화, 사회 등과 같은 개념이 사라졌을 정도로 인간의 언어와 존엄 모두 바스러진 상태다. 자기 이름을 모르는 주인공은 임신한 여동생을 데리고 물과 식량을 찾아 폐허가 된 도시를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우연히 물과 식량이 있는 임시 거주 공간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주인공과 여동생은 검은 플라스틱 조각을 발견한다. 여동생이 햇빛에 갖다 대자 찰리 채플린 감독의 <키드>(1921) 명장면 하나가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온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필름 조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영화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신기하게 쳐다볼 뿐이다. 여동생은 매일 필름 조각을 손목시계처럼 지니면서 만지는 반면, 주인공은 임시 거주 공간에 쌓인 동화책들을 독학하며 점차 문맹에서 벗어난다. 한동안 평온하게 생존하던 두 사람은 결국 식량이 떨어져 한밤중에 길을 나선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린 생존자들 무리를 우연히 마주치는데, 이들은 여동생의 불러온 배를 갑자기 가리키며 짐승, 아들, 혹은 딸이라고 서로 우긴다. 본인이 옳다는 걸 입증하고 싶은 이들은 순식간에 여동생의 배를 갈랐고, 주인공은 허무하게 여동생을 잃는다. 너무 뜬금없지만 해당 장면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는 이성적인 사고보다 비이성적인 호기심이 우선임을 단적으로 보여줘 굉장한 충격을 안긴다. 2084년 9월 어린 생존자들의 무리마저 전멸하고 주인공은 파리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더는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 찰나에 주인공은 문득 필름 조각이 궁금해져 <키드> 필름 보관함에 적혀 있는 볼로냐 시네마테크에 가기로 결심한다.



이때 조나단 노지터는 로드 무비의 형식을 활용한다. 어떤 긴 여정을 그려내야 하는 조나단 노지터의 입장에서는 로드 무비의 형식이 당연하고 안정적인 선택일 테다. 그렇지만 로드 무비가 무언가를 개척하는 서사를 다룬 서부극에서 파생된 사실을 상기하면, 조나단 노지터는 지구 최후의 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류의 유산을 찾아야 하는 주인공의 고독한 운명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관객들이 이 여정에 간접적이라도 참여하게 만듦으로써 <최후의 언어>를 이루고 있는 가정적 전제와 상상력을 설득하고자 로드 무비의 문법을 빌려온 게 아닐까 싶다. 주인공은 ‘호출’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황폐해진 거리와 메마른 계속을 걷는다. 주인공의 경로와 시선을 좇다 보면 널브러진 간판, 고장 난 전화 부스 등이 눈에 들어온다. 간판을 이루는 건 글자라는 점과 전화 부스가 소통을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해당 미장센은 언어가 거의 소멸하였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주인공이 발굴해야 하는 유산은 언어와 유관하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준다.



3개월 만에 볼로냐 시네마테크에 도착한 주인공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맹수의 포효와 원숭이의 격렬한 소리에 겁에 질리지만, 그곳에는 노인 셰익스피어(닉 놀테)만 있을 뿐이다. 주인공이 계속 짐승이 어디에 있냐고 묻자 셰익스피어는 웃으며 주인공을 어딘가로 안내한다. 수많은 필름 통이 쌓인 통로를 지나 큰 방에 들어서자마자 셰익스피어는 직접 영사기를 돌리며 주인공에게 W.S. 밴 다이크 감독의 <타잔 – 조니 웨이스뮬러 편 1>(1932)을 틀어준다. 주인공은 분명 현장에 없는 동물과 사람이 실재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영상물에 깊이 매료된다. 심지어 주인공은 밤새면서 알렉산더 헤르츠 감독의 <베스티아>(1917), 버스터 키튼 감독의 <셜록 2세>(1924), 이타미 주조 감독의 <담뽀뽀>(1986) 등 수많은 필름을 돌려 보기까지 한다. 지금까지 생존에 급급했던 주인공은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이미지와 다채로운 감정을 선물하는 필름에 매혹될 수밖에 없을 테다. 심지어 취침 중인 주인공의 장면과 오마주한 고전 영화들의 장면을 교차 편집함으로써 필름이 주인공의 무의식까지 침투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나열하는 방식만으로 고전 영화를 오마주한 조나단 노지터의 연출력은 다소 아쉽다. 하지만 인간이 겪는 희로애락을 짧은 시간 안에 그려내며 짙은 여운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인상 깊다. 무엇보다 몰아치는 오마주는 바로 영화가 주인공이 찾아야 하는 인류 최후의 유산임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온종일 필름을 감상하는 주인공을 지켜보던 셰익스피어는 시네마테크에서 본인이 직접 찾은 카메라 부품을 건네며 인류의 마지막 카메라를 만들라는 소명을 전한다. 사실 이는 셰익스피어가 주인공에게 데니스 포터와 멜빈 브러그의 담화 영상을 틀어준 순간에 예견됐다. 영상 속 데니스 포터는 “우리가 쉽게 잊곤 하는 건 인생은 현재 시제로만 나타난다는 겁니다. 오로지 지금에만 존재합니다. 저는 그 현재성을 강렬하게 느낍니다. 모든 것의 현재성은 참으로 경이로운 겁니다”라고 진중하게 말한다. 셰익스피어가 주인공에게 해당 영상을 보여준 건 영화만이 삶의 현재성을 지속시켜 나중에 다른 사람들과 경이로움을 공유하는 일을 가능케 한다는 걸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무엇보다 셰익스피어는 지금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필름과 카메라를 제조하지 않으면, 생의 흔적을 남길 마지막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을뿐더러, 나만의 세계를 재건하고 상대방의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기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마저 잃을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을 전한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아주 갑작스러운 소명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한다. 이에 셰익스피어는 아이소아밀알코올, 메틸알코올 등의 혼합물로 필름 조각을 만다는 법을 전수한다. 여기서 조나단 노지터는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안달루시아의 개>(1929)를 오마주함으로써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에 필름 조각이 재탄생한 순간을 시네마틱하게 그려낸다.



“비어 있는 서판이다. 마법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는 입자야. 흔적을 남길 마지막 기회라고!
삶의 흔적, 우리의 증언, 우리의 흔적. 생의 흔적을 남길 마지막 기회란 말이다.”
– 극 중 셰익스피어의 대사


필름을 완성한 두 사람은 2085년 1월 영사기, 고전 영화 필름, 필름 조각, 미완성 카메라를 들고 ‘호출’ 표지판을 따라 아테네로 향한다. 여정 내내 두 사람이 마주한 건 사막이 된 유럽 대륙과 갈색으로 오염된 바다 풍경밖에 없지만, 죽기 전에 영화의 기적을 한 번 더 일으키겠다는 소명을 다하고자 계속 걷는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광활한 녹지대를 발견했고, 그곳에 도착하자 인류의 마지막 의사 지베르스키(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셰익스피어와 주인공을 맞이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대와 달리, 생존자들은 공동체를 형성하기는커녕 죽음만 기다리며 허송세월하는 중이었다. 이들의 모습에서 자기 과거를 마주한 주인공은 본인이 볼로냐에서 겪은 일련의 신비로운 경험을 나누기 위해 영사기와 고전 영화 필름을 세팅한다. 주인공이 영사기를 작동시키자 벽면에 영상이 투사되고, 신기한 광경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고 구경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표정을 확인한 주인공은 셰익스피어가 그랬듯이 프리츠 랑 감독의 <메트로폴리스>(1927), 마리오 모니첼리 감독의 <래프 포 조이>(1960), 켄 휴즈 감독의 <치티 치티 뱅 뱅>(1968), 테리 존스와 테리 길리엄 감독의 <몬티 파이톤 - 삶의 의미>(1983) 등을 하나둘씩 소개한다. 덕분에 아테네 생존자들은 잊고 있던 삶의 요소들을 다시 감각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자율성과 가치 판단 능력까지 점차 회복하며 존엄적인 인간으로 회귀하기 시작한다. 특히 프레스턴 스터지스 감독의 <설리반의 여행>(1941)은 삶을 바꾸는 문학적 도구로서 역할을 해내며 아테네 생존자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감각하는 눈을 터득한다. 더 나아가, 이들은 각자의 세계를 재건하고 타인과 교감하며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처음으로 희망을 품는다.



그사이 주인공은 기계 역학을 아는 지베르스키와 필요한 부품을 가져다주는 바틀크(샬롯 램플링)의 도움까지 받으며 비로소 촬영 카메라를 완성한다. 주인공은 데니스 포터가 말한 삶의 경이로운 현재성을 타인들과 공유하기 위해, 그리고 인류 최후의 영화감독이 되라는 셰익스피어가 전한 소명을 다하기 위해 곧바로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닌다. 부끄러워하던 생존자들은 어느새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며 타인과의 교감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에 주인공은 ‘사람들이 떠나고도 필름에 남았다’는 오프닝에서의 독백처럼 생존자들이 죽어서도 필름 안에서만큼은 자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들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모두 기록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지가 베르토프 감독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처럼 생존자들의 다양한 삶과 이야기를 모자이크한 다음, 아테네 신전에 투사해 함께 관람하며 삶의 의미를 되찾아 가는 과정을 계속 밟는다. 그 덕분에 생존자들은 상대방이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대하는 태도를 계속 공유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자극하는 일을 경험한다. 특히 임신하기 어려운 나이임에도 기적적으로 아이를 잉태한 바틀크의 모습은 이와 같은 경험이 지속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리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틀크는 출산과 동시에 사망했고, 태어난 아기도 곧 숨을 거둔다. 설상가상으로 기침 바이러스가 녹지대에 퍼져 아테네 생존자들이 점차 무기력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럼에도 <최후의 언어>는 끝까지 생동감을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구가 생명력을 다했음에도 소임을 다한 주인공의 노력 덕분에 세상을 떠난 자들의 삶이 필름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순환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조나단 노지터는 “비옥한 땅이 없어 씨를 심지도 못했지만, 이건(필름) 심을 수 있어”라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빌려 영화가 인류 문명의 씨앗이라는 믿음을 굳건히 한다. 결국 그는 <최후의 언어>를 통해 영화가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유산이라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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