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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링스 Dec 13. 2021

"'원래 그래'는 RPA나 줘버려"

작년 여름, 생애 첫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을 때 헤드헌터가 자기소개하는 코너에 성격을 몇 줄 써달라고 했다. 다섯 가지의 회사에서의 성격을 썼고, 1번으로 쓴 것은 "일을 대충하는 것을 싫어하고, “원래 그래”라는 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였다. 무엇을 혐오하는 지가 정체성을 잘 드러난다고 했었나. 소개팅 받을 때도 절대 안되는 것을 말해야하는 것처럼. 멘토링을 하게 될 때에도 가장 경계해야할 것을 "원래그래정신"이라고 했다. 


아무튼 "원래 그런 게 어딨어"라는 말은 내 직장생활에서 굉장한 호불호를 자아냈는데, 불호의 저항은 갈등을 일으키기 마련이었고 자칫하다가는 트러블메이커로 관심사원이 되기 쉽다. 어릴 적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심지어 명절의 제사상 앞에서도 이 말은 꽤나 금기시되어 왔다. 상대방이 나를 납득할 만한 신뢰를 쌓은 관계이거나, 상황을 회피하는 유머를 곁들이거나, 지속적으로 세뇌를 하거나, 대안을 제대로 제시했을 때 정도에야 뚫고 나갈 수 있는 그런 벽이었다. 


어차피 원래 그래라는 말의 "원래"라는 말이 "일하는 방식"에는 걸맞지 않는 용어다. 많이 양보해서 생물학적인 부분까지는 원래 그래로 싸울 수 있다고 보지만(남녀의 성역할 중 정말 생물학적인 것), 사회생활에는 "원래" 원래란 없는 것이다. 회사생활에서는 겨우 창업자가 손에 잡힐만큼 가까운 시기에 창업했을 때 정도 원래는 유효할 것 같다. 그렇기에 단지 "왜"에 대한 계승이 끊어졌기 때문에, 즉 원래 왜 그랬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원래 그래"만 우주미아처럼 남아 맴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대충 미아찾기를 회피하는 경찰처럼 "원래 그래"를 되뇌일 뿐이다.


하지만 집단주의로 버틸 수 있던 산업화 시대가 끝나간다. 너무나 지루하게도 변화를 얘기한다. 거대한 집단으로 사람을 이해하기는 점점 어려워만 지고, 헤게모니를 가진 가치관들도 점점 사라져간다. 그런 시대 속에서 원래는 꼰대로 희화회되어 소비되기도 한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 많은 회사에서는 이 "원래 그래"가 말뚝박고 "내 눈 감기 전에는..."의 감수성으로 혁명군들을 막아서고 있다.


그런데 그 바리케이트를 한 방에 날릴 놈들이 오고 있다. 되바라진 Z세대들이 아니다. 가깝게는 RPA(Robotic Process Automation)가, 멀리는 AI가 진정한 주동자다. RPA는 3~4년 전 전 직장에 있을 때부터 이미 취합해서 적용한다는 말이 나왔었다. Operation 본부에서는 일부 시행이 되었고, 사업부서에서도 실적을 관리하는 영역이나 서류 처리를 하는 부분에서 도입되기 시작했다. 


근데 업무자동화가 "원래그래"랑 무슨 관계일까? 태생적으로 RPA는 "원래"를 먹고 사는 놈일 수 밖에 없다. "원래 그래"의 논리로 막히는 업무는 별다른 고민이 없다는 뜻이고, 원래 하던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고, 원래 하던대로를 자동화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즉, 원래 그런 것만이 어쩌면 업무자동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 결국 로봇으로 대체가 되지 않으러면, 결국엔 "원래 그런 게 어딨어"라며 새로운 방법과 가치를 제안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로봇이 치우러 올 때 '니가 뭘 알아?'라는 정신으로 불편하지만 새로운 길을 외로이 걸어야 한다. 그렇게 회사의 짧은 미래를 상상해보면 원래 그래를 외치던 사람들은 이제 RPA로 처리가 되어 그 당당함을 잃게 될 것이고, 원래 그런 게 어딨냐던 사람들은 쫓아오는 로봇기술들을 가까스로 따돌려가며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고 있지 않을까. 물론, 짧지 않은... 긴 미래를 떠올린다면 그 새로운 방식의 생각도 AI라는 신입의 몫이 될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제 아마 한동안은, "이거 왜 이렇게 하는 거예요?"라고 했을 때, "원래 그래"라고 말한다면, "원래 그런 게 어딨어요?"라고 얼굴만 붉힐 게 아니라, "아, 그럼 그냥 RPA 도입해서 자동화 하면 되겠네요."라고 좀 더 크 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원래 그래를 입에 달고 살았다면 이젠 조금씩은 변화해야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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