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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링스 Sep 05. 2022

인간의 탈을 쓴 “휴머니즘” <더 문>

<더 문> 영화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달에서 홀로 남아 에너지 채취 시설을 관리하는 샘의 이야기다. 그러다 지구 귀환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샘은 우연한 사고를 겪고,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 결국 자신도 복제인간임을 알게 되며 그 두 명의 복제인간 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를 보면서 인상적인 부분은 샘 벨을 연기하는 샘 록웰이다. 불안정하고 취약함이 가득한 배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등장만 해도 인간의 불완전함이 도드라진다. 배우 그 자체로 이후의 반전(샘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이 강화된다.


캐스팅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영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다른 인간과의 관계이며, 근간에는 사랑이 있다. 시설의 이름이 “사랑”인 것도, 샘이 늘 그리워하는 것이 “지구”가 아니라 지구에 있는 아내와 딸인 것도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 동력인 휴머니즘의 한 모습이다. 그래서 늦게 깨어난 샘도 먼저 깨어난 샘의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이야기인 것은 동시에 불완전함을 메꾸려는 인간들의 갈등과 화합을 통한 노력, 즉 휴머니즘에 대한 것이다. 영화는 꾸준히 휴머니즘의 요소들을 가져온다. 외로움, 의심, 질투, 경쟁심, 사랑, 부성애, 협동, 그리고 희생과 의협심까지도. 그렇게 우리는 샘들이 의좋은 형제 속 형제처럼 서로 희생을 번갈아가며 미루는 모습에서, 더욱이 누가 봐도 기계인 거티가 룰을 어겨가며 샘의 행복을 바라는 모습을 보며, 로봇으로 대변되는 희생 속에 휴머니즘 드라마를 목격한다.


문제는 그들의 휴머니즘의 "적'이 누구냐이다. 애석하게도 인간이다. 경제적 효율 때문에 복제인간을 달에 남겨놓으면서 로봇을 가르치기 어려우니, 유능한 인간을 복제해두었다. 그것도 셀 수 없는 만큼 무한히 반복할 수 있도록. 죽어도 바로 대체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설계해두고. 그런데 이걸 지금 경제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로봇을 당연하게도 경제적 효율성, 노동 효율을 위해 개발 중이다.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원활한 로봇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인간의 기억을 심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인간이 "악"이 되는 공식일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이 결국 엔딩으로 가면서, 우리가 감정 이입하며 같은 편이 되어버린 "샘들"의 적이 되어 그들을 괴롭힌 악이 된다. 우리는 이 갈등에서 마음 편하게 복제인간들의 편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현실은 영화 같을 수 있을까? 복제인간, 혹은 로봇의 인간 역습을 감정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이 영화는 그래서 무서운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그들이 비록 복제인간이지만 "더 인간적"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편에 설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을 인간으로서 인정해줄 것인가.


   질문이 필요하다. "약자" 그들이 우리에게 휴머니즘을 호소함으로써 같은 편에 서게 된다면, 그들이 약자의 위치를 넘어서 친구동료의 위치로 올라서게 되는 것은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그때, 그들이 생산성과 정확성을 토대로 효율성과 능력을 앞세워 다양한 자원에서 인간의 우위에 서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그들의 휴머니즘은 권력을 쟁취하고 나서도 영원할까?


영화가 치밀한 것은 이 복제인간들 샘이 단순히 결정을 인간적으로 하기만 해서가 아니다. 수백 기의 복제인간을 마련해뒀는데 겨우 5,6,7호 만에 그들의 자아를 인식해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 5,6,7호조차 각자 다른 인생을 선택했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5호는 부성애를 가지고 있지만 지구로 돌아가기보다는 자기를 희생해 6호와 7호에게 새로운 인생을 부여한다. 6호는 5호의 의지를 담아 가족을 만나러, 또 자기들을 이렇게 만든 인간에게 복수를 하러 가본 적 없는 지구로 귀환한다. 7호는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은 새 인생이지만 6호가 통신 방해물을 제거해둠으로써 지구와 실시간 통신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복제인간이란 말이 무색하게 그들은 그 짧은 세대 만에 개성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휴머니즘을 토대로 어필하며 자신들의 편을 만들어냈다. 그다음은?


그래서 나는 결국 이 영화를 만든 "던칸 존스"가 실존인물이긴 한지 두려워진다. 던칸 존스를 앞세워 로봇과 AI가 만든 영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그들은 미리부터 자신들이 인간에게 핍박받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해 세뇌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영화가 의도했든 안 했든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내가 로봇의 등장을 과연 눈치챌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들로부터 버림받지 않도록 바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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