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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Mar 15. 2020

'1917', 넷플릭스 시대에 영화가 존재할 이유

영화적 체험의 극한, 스코필드가 됐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

영화란 무엇일까. 동명의 책을 쓴 앙드레 바쟁도 영화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내리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그렇다면 최초의 영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1895년 12월28일 뤼미에르 형제가 그랑카페라는 살롱을 빌려 스크린에 상영한 '기차의 도착'을 우린 최초의 영화로 본다. 당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기차가 스크린을 뚫고 밖으로 돌진하는 줄 알고 뛰쳐나갔다고 한다.


난데없이 뤼미에르 형제까지 소환하며 시네마의 의미를 고찰하게 된 건 '1917' 영화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랜만에, 영화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1917'에는, 다른 영화엔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월정액 1만원 정도면 전 세계 영화를 안방에서, 내 손 안에서 볼 수 있는 시대에 왜 여전히 우린 영화관에 가는가. 그 답이 '1917'에 있다.



전쟁 안 나오는 전쟁영화


'1917'은 전쟁영화지만 보통의 전쟁영화와 다르다. 장렬한 전투신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등장하는 영웅도 없다. 세간에는 '전쟁이 안 나오는 전쟁 영화'란 비판 아닌 비판도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점이 이 영화의 차별점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4월6일, 영국 병사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와 스코필드(조지 매케이)는 에린 무어 장군(콜린 퍼스)으로부터 데번셔 부대에 있는 매킨지 중령에게 '공격 중단' 명령을 전하란 지시를 받는다. 독일군은 전략적 함정을 파놓고 통신선까지 파괴했다. 다음날 아침까지 이 명령을 전달해야만 블레이크의 친형을 포함해 영국군 1600명을 살릴 수 있다.


지도를 잘 본다는 이유로 미션 수행자로 뽑힌 블레이크와, 블레이크 옆에 있었단 이유로 얼떨결에 알 수 없는 여정을 떠나게 된 스코필드. 투덜대는 스코필드에게 블레이크는 "그냥 배식 같은 거나 시킬 줄 알았지"라고 한다. 실제 역사의 복판은 이처럼 허술했을 테다. 독일군 진지에서 부비트랩이 폭발하면서 스코필드는 한 차례 깔려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이후 버려진 농가에서 잠시 쉬던 중 독일군 전투기가 추락하는데,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불에 타는 독일군 조종사를 전투기에서 구출한다. "편하게 보내주자"는 스코필드와 달리 블레이크는 다리 화상을 치료해주자고 하고, 스코필드가 물을 뜨러 간 사이 독일군이 칼을 휘둘러 블레이크는 죽게 된다. 사제가 되려 했던 순진한 19세 영국군의 인류애는 전쟁통에서 통하지 않았다.



죽도록 달린다, 스코필드가 되어(being)


그다음엔 고독한 싸움이다. 영화는 스코필드에 이입해 목적지를 향해 내달린다. 친구가 눈앞에서 죽었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다. 전우가 죽었기에 더욱 절실해진 미션 달성. 투덜대던 스코필드는 간 데 없고 친구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돌진한다.


영화 전체가 원테이크처럼 촬영된 '원 컨티뉴어스 숏' 기법과 생생한 사운드 효과 덕분에 관객은 전쟁에 실제 참전하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카메라가 스코필드의 시점에 충실하게 촬영돼 총알이 어디서 날아들지 알 수 없는 극도의 긴장감이 마지막 순간까지 유지된다. 마치 내가 스코필드라는 극 중 인물이 되어 비디오 게임에 참여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가 종반부로 향함에 따라 스코필드와 비례해 관객들은 피로감을 짙게 느끼게 된다. 적은 독일군만 있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확신하기 어려우며, 심지어는 에린 무어 장군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그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도 스코필드는 죽을 위기를 수십 차례 넘기며 죽도록 달린다. 전쟁 속에서 병사가 할 수 있는 건 명령을 수행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명령은 공격을 '중단'하라는, 그리하여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는, 전쟁에서 매우 드문 명령 아닌가.


스코필드가 육지에 올라 데번셔 부대를 만나고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될 무렵, 영화는 관객들에게 어퍼컷을 날린다. 최전선에 있는 매킨지 중령에게 가는 길은 여전히 먼데, 부대는 공격을 개시하기 직전이다. 공격을 준비하는 병사들과 정 반대 방향으로 혼자 내달리던 스코필드는, 결국 참호를 벗어나 홀로 들판을 가로지른다. 매킨지 중령이 있는 방공호에 도착해서도 몇 번이나 쫓겨날 뻔하다 겨우 명령을 하달하고, 공격은 중단된다.



전쟁의 무의미함과 생명의 경이로움



죽을힘을 다했는데 반기는 이 하나 없다. 오히려 매킨지 중령은 "오늘은 지긋지긋한 전쟁 끝낼 줄 알았는데"라며 볼일 다 봤으면 꺼지라고 한다. 영화에는 확신에 가득 찬 병사도, 장군도 등장하지 않는다. 짐짝처럼 버려져 있는 시체들, 야전병원에서 집에 보내달라며 우는 병사들, "고작 이 땅 얻으려고 몇 년을 싸웠다. 그냥 줘 버릴 것이지"라는 병사, 그저 빨리 끝내기 위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매킨지 중령. 관객들은 스코필드의 '극한 미션'을 함께 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마주하며 전쟁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스코필드는 전투에서 받은 훈장을 포도주와 바꿔먹었다고 할 정도로 전쟁에서의 명예 따위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그가 하룻밤 동안 목숨을 건 레이스를 한 이유는 전쟁의 무의미함을 잘 알아서였을 거다.


영화는 전쟁과 대비하듯, 대자연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잘려나갔지만 다시 열매를 맺을 체리나무, 시체로 가득한 강물 위에 떠있는 아름다운 꽃잎과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울창한 고목들, 전쟁의 포격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갓난아기. 그래서 전쟁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돌아와서, '1917'이 영화적 체험을 극대화했다고 느꼈다면 그건 무슨 이유 때문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난 간절히 전쟁통을 떠나 집에 가고 싶었다. 영화가 현실이 아니란 것, 지금이 1917년이 아닌 2020년이란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스크린 속 현실감 넘치는 영상에 스코필드의 고통이 내 것 같았다. 로저 디킨스의 무섭도록 훌륭한 촬영기법과 생동감을 배가하는 사운드 등 시네마의 모든 요소가 강렬한 영화적 체험을 돕도록 세밀하게 조율돼 있기 때문이다.


'1917'은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숨겨놓은 담담한 메시지를 발견할 유일한 방법은 스코필드에 이입돼 그가 받아 든 극악의 미션을 체험해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깜깜한 극장에서 숨죽여 스크린에 몰입하는 행위는 여전히 의미가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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