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시 어우러져 춤출 수 있을까
재작년 9월, 생전 처음으로 2주 휴가를 받아 프랑스 여행을 떠났다. 니스, 부르고뉴를 거쳐 파리에 가는 일정이었는데, 줄곧 혼자 다니던 난 파리 근교 몽생미셸 투어에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이곳 재즈바에 같이 갔다. 영화 ‘라라랜드’에 나와서 유명해진 곳(Le caveau de la huchette)인데, 그야말로 온 인류 남녀노소가 뒤엉켜 춤판을 벌이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나중엔 다들 땀으로 샤워를 할 지경이었다. 나와 일행도 초반엔 얌전히 칵테일만 마시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현지 문화 체험을 제대로 하고야 말았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몸이 못 떠나니 눈이라도 떠나려 괜히 여행 사진을 뒤져보는데, 이걸 보니 마음이 참 그렇다. 자유라는 건 이렇듯 신체가 자유로이 움직이며 체취와 땀과 흥을 공유하는 모습이 아닌가. 사회적 거리두기는 내 반경 2m에 사람이 없어 내 신체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혀 인간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고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히는 것 외에 문화적으로 얼마나 큰 손실을 입히고 있는지, 난 그 점에 주목하고 싶다. 코로나는 인류가 모여서 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예술활동에 제약을 가하고 있다. 재택으로 사무직 근무는 가능할지 몰라도 공연은 원격이 안 된다. 여행이 막히면서 서로가 뒤섞이고 이런 아름다운 어우러짐을 느껴볼 기회가 차단된다.
코로나로 확진자, 사망자 수가 중국을 뛰어넘는 비극이 벌어진 이탈리아에선 각자의 집 발코니에 나와 따로 또 같이 노래하고 춤추며 ‘자가격리 맞춤형’ 예술을 벌이고 있다. 그 영상을 보는데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난의 현장에서도 주저앉아 울기보다 마지막 순간까지 유희를 찾으려 애쓰는 게 사람이고, 그런 예술성이 인류의 위대한 점이 아닐까.
물론 지금은 그 무엇보다 방역을 최우선 가치에 둬야 하는 때가 맞다. 빠른 원상회복을 위해서라도 다소 비인간적인 거리두기를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가끔 유럽 등지에서 이 시국에도 모여 파티와 축제를 벌이는 젊은이들을 보면 뭐랄까, 한숨 나오고 답 없단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가슴속 한 군데가 뻥 뚫리는 듯한 기분도 든다. 대리만족이랄까. 인간 본성은 거스르기 어렵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는 것 같아서다.
우리 정부는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에 사활을 걸고 있다. 중국, 유럽 등과 같은 강제적 도시 봉쇄 없이 시민들의 의식에 기대 이 정도의 방역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놀랍고 칭찬할 만하다. 대다수 시민들이 자신의 건강뿐 아니라 타인을 배려해 ‘집콕’을 자처하며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봄이 오는데 꽃놀이도 자제하고 말이다.
사회적 대의를 위해 개인의 본성을 거스르는 숭고한 시민의식 또한 인간의 위대한 점이다. 하지만 몸이 먼데 마음이 가까울 수 있을까. ICT(정보통신기술)가 아무리 발달한들 인간의 스킨십을 대신할 수 없으며, 물리적 거리를 메울 순 없다. 심지어 ‘사회적 거리두기’란 용어는 서로의 심리적 거리마저 멀게 하는 느낌이 든다.(‘물리적 거리두기’가 맞는 표현이란 의견이 나온다고 한다.)
어찌 됐든 코로나 시국이 얼른 끝나 사회적 거리 두기고 뭐고 이 요상한 행위를 때려치울 수 있기를 소망한다. 거리두기가 미덕이 되는 것은 너무나 이상하다. 이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정말 사람들이 서로를 대할 때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서로를 감염원으로 의심하는 인식이 굳어질지 모른다. 그건 인류 문화와 예술에 있어 최악의 후퇴를 불러올 것이다. 이 사진과 같은 후끈한 광경은 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