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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Nov 05. 2018

프랑스로 떠난 이유(feat. 더패키지)

프롤로그 2. 때론 드라마 한 편이 수천마일의 여행을 결정한다.


프랑스여야 했다. 이번 여름휴가의 행선지는 올해 초에 아주 일찌감치 정해졌다. 


여행지의 선택엔 수많은 요소가 작용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물음은 무릇 철학적인 질문이다.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또 무엇이 결핍됐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나의 심리적, 육체적 상태, 욕구가 총체적인 영향을 끼친다. 직장인이 된 후 휴가 때마다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지의 선택은 쉬웠던 적이 없다. 가고 싶은 곳은 많고 시간과 예산은 한정돼 있어서다.


이번엔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떠나기 몇 달 전부터 머릿속에 여행지를 그려볼 수 있었다. 왜 프랑스를 골랐냐면, Jtbc 드라마 '더 패키지' 때문이다. 좀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난 진지하다. 이 드라마는 작년 10~11월에 방영됐는데 당시엔 방영 사실도 몰랐다가 올해 1월부터 다시보기를 시작해 7월 정주행을 마쳤다. 재미없어서 6개월을 끈 건 아니다. 바쁘기도 했지만, 너무 좋아서 끝나는 게 아쉬워서 아껴 봤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결말을 빨리 알고 싶어 죽겠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고 한 회 볼 때마다 최상의 집중이 가능한 상태에서 곱씹으며 보고 싶은 드라마였다. 손수 만든 파스타와 와인을 곁들이며 봐야 할 것 같았던.



돌이켜보면 소소(이연희분)에 날 이입했던 것 같다. 소소는 지난 상처와 자신에 대한 미움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는 사랑에 회의적이고 운명 따윈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기가 선택한 게 운명이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운명을 믿고 싶어한다. 사랑에 배신당한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혹독하고 다가오는 사랑에 까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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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정용화분)는 대책없다. 딱하기론 소소 못지않다. 같이 떠나기로 한 여친한테 바람맞고 혼자 프랑스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을 떠나는 이들 대부분이 그렇듯 엄청난 문제를 안고 왔다. 회사의 내부 비리를 고발하고 휴가를 '질렀다'. 애인이 여행 당일 공항에 나타나지 않아서 혼자 왔다. 여행 도중에도 상사가 전화해서 일 마감하고, 당장 돌아오라는 독촉을 받는다. 


대책없는 두 명은 여행의 과정에서 치고받고 오해도 하지만, 결국 서로의 상처를 치유한다. 둘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장소는 '몽생미셸'. 소소는 자신이 언약식을 올렸던 몽생미셸 성당에서 우는 모습을 마루에게 들키고, 이를 계기로 급격히 가까워진다. 소소는 계속 마루를 밀어내려 하지만, '천사의 발 밑에서 영원한 사랑을 만난다'는 점괘처럼 그에게 점점 이끌리고 마음을 연다. 



마루는 도망치듯 떠난 여행을 통해 일상을 되돌아본다. 자신을 믿는다고 말한 여자친구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다. 자신의 신념을 지지해주지 않았으며 불의와 현실과 타협할 것을 종용했다. 이런 마루에게 소소는 "쉬는 것도 용기"라고 말해준다. 마루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마루는 소소의 도움으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일과 사랑, 신념에 관해 답을 얻는다. 신뢰가 절실했던 마루에게 소소는 믿음을 줬고, 운명을 믿지 못한 소소에게 마루는 운명이 돼 주었다.


인생은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1년에 최대 15일에 불과하지만 여행지에서의 압축적인 선택과 경험이 농축된 깨달음을 주고, 인생의 다음 스텝을 인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회에 이런 주옥같은 대사가 나왔다.


“여행이 뭔지 아세요? 나그네 려 갈 행. 나그네가 되어 떠나간다.”

“짐을 싸다 보면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필요한 옷가지 몇 가지 싸는 게 다가 아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고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게 뭔지도 알고 또 절대 포기해선 안되는 게 뭔지도 알게 된다. 새 가방 사서 새로 짐을 한 번 꾸려봐라. 그럼 내가 누군지 알게 되고 여행을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게 될 거다.”



이렇게 온갖 요소가 더해져서 프랑스 로망이 완성됐다. 올 상반기 내내 일상에 큰 위안을 준 드라마 속 공간을 직접 찾아가는 것은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몽생미셸의 존재도 알지 못했는데, 드라마를 보다가 완전 꽂혔다. 풍광 자체도 너무 이뻤고 마루와 소소의 로맨스가 한몫 했다. 몽생미셸은 뭔가 새롭고 흔하지 않고 미지의 장소처럼 홀로 외따로 떨어져있단 데서 도전의식이 생겼다. 


파리는 10여년 전 친구와의 유럽배낭여행 중 3~4일간 갔었는데 기억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독일 등 다른 국가에 비해 거리도 더럽고 지하철 냄새도 심하고 특별히 이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은 몇 번씩 다시 찾았지만 프랑스는 뒷전이었다. 근데 드라마를 통해 다시 보니 파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였나 싶었다. 당연히 파리도 여행지에 포함됐다.


원래는 파리에서 여유롭게 2주 체류하면서 하루이틀만 몽생미셸에 할애하려 했다. 여행 말고 살기, '파리지앵' 놀이를 해보려는 구상이었다. 일주일 여행 중에도 수많은 도시를 이동하고 당일투어도 마다하지 않는 내 여행스타일을 의식적으로 바꿔보려 했다. 파리는 2주간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결론적으론 실패했다. 사람은 안 변한다고, 아무래도 한 도시 2주는 성에 차지 않았다. 여기에 여행기간이 길단 이유로 우리 이모가 계신 니스가 더해졌고, 뜬금없이 부르고뉴 지방 본(Beaune)도 경유하게 되면서 대장정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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