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보다 '워맨스' 돋보여...'헤어짐'에 대한 진득한 접근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내 주변 많은 사람들이 초반에 기대하고 봤다가 혹평한 작품이다. 이 드라마가 왜 후진지 말로만 들어도 이미 실망스러웠다. 그러다 좀 뒤늦게, 한가했던 어느 날 밤 4화를 몰아 봤다. 지인들이 왜 혹평했나 이해가 되면서도 빠져들었다.
일단 이 드라마는 다소 시대와 맞지 않는 면이 있다. 소위 ‘빻았다’고 말하기 충분한 시대착오적인 대사와 장면이 종종 나온다. 하영은(송혜교분)이 초반에 친구한테 썸남 윤재국(장기용분)을 설명하면서 “자꾸만 방심하면 늘어지는 피부와 자꾸만 게을러지는 내 몸에 적당한 텐션을 부여하는 동기부여다, 버텨 너 아직 괜찮아”라고 했을 때 진심 티비를 꺼버릴까 최대 위기.. 남자를 여자의 텐션 따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묘사한 것도 기막히고, 여자의 자존감은 남자로 인해 유지될 수 있다는 발상도 황당. 형제가 동시에 사랑한 여자라는 컨셉은 다소 올드하며, 단 2개월 만난 사람을 10년째 잊지 못해 괴로워한단 설정도(물론 실제로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만) 보편적인 공감을 사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걸 끝까지 본 이유는 많다. 제일 크게는 4화 라스트신의 이 대사 때문이다. “우리가 앞으로 뭐할 건지, 계속 만날 건지 말 건지 그건 당신이 선택하면 돼요. 근데 이거 하나는 대답해요. 나 보고 싶었니?” 멜로드라마는 가슴을 치는 대사 한마디, 한 장면을 위해 보는 거라 생각하는데 나한텐 이 씬이 그랬다. 바로 뒤이어 그들의 얽히고설킨 과거 서사가 풀리는데, 아 이 둘은 이뤄져야 해, 절로 응원하게 하는. 한때 드라마를 공부해본 입장에서 서사를 꽤나 차곡차곡 쌓았다고 느껴졌고 그걸 결정적인 순간 터뜨린 대사도 좋았다.
슬프게도 둘의 멜로로 보면 이 장면을 뛰어넘는 장면이 별로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다. 재국이 초인종을 누르는데 영은이 문을 열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열면서 서로 마음을 확인한 장면 정도? 다만 애초 제목에 스포가 나와 있듯이 이 드라마는 쭉 헤어지는 중이다. 둘이 마음을 확인한 다음에도 도무지 연애를 제대로 하긴 한 건지, 맘 편히 꽁냥 거리는 장면은 거의 나오질 않는다. 이 점이 둘의 멜로를 기대하며 보는 대다수 시청자들의 분노를 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난 이걸 일종의 컨셉으로 받아들였다. 사랑하는 중인 드라마는 차고 넘치니까, 어쩌면 살면서 우린 사랑 중인 때보다 헤어지는 중일 때가 많으니까. 이들처럼 사랑하지만 주변 반대로, 일 때문에, 다른 소중한 걸 지키느라, 헤어짐을 선택하기도 하니까. 드라마는 사랑이란 건 상대가 도망 못 가게 옆에 붙들어놓는 게 아니라, 함께하지 못해도 “그 사랑으로 길을 내고 그 사랑으로 앞에 난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둘은 수년 뒤 우연히 재회해서까지 ‘헤어지는 중’이라며 끝맺는다. 작가는 결국 모든 사람들은 헤어지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나아가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 게 성숙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이다 전개’를 바라는 한국 시청자들의 기대를 알 텐데도 이런 선택을 한 점이 오히려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드라마에서 더 돋보인 건 멜로보단 일, 우정이다. 패션업계 이야기가 꽤 디테일하게 전개되는데 고증을 많이 했는지 현실감이 있었고 눈도 즐거웠다. 하영은 캐릭터는 역시나 드라마라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지만(흙수저 출신인데 디자인팀장으로 성공해 ‘한강뷰 아파트 마련’) 직업의식, 갈등 상황에서의 중재, 후배를 대하는 리더십, 일과 사랑, 현실 안주와 새로운 도전 사이의 고민 등 와닿는 점이 많았다. 특히 후배들이 자존심 지키며 일할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했다. 마지막 회에 그간 일하며 관계 맺은 이들이 모두 영은이 일에 발 벗고 나선다고 하는데 제일 감동적이었던 장면. 난 취재원들과 어떤 신뢰관계를 맺어왔나, 생각해보게 됐다.
세 여자의 우정도 빼놓을 수 없는데, 멜로가 아니라 워맨스로 홍보했어야 한단 말이 나올 정도. 첨엔 민폐 캐릭터인 줄 알았던 치숙이도 갈수록 매력적이었고 삶과 헤어지는 중인 미숙이 때문에 많이 울었다. 서브 커플인 치숙과 석대표의 멜로가 메인 커플보다 더 멜로 같고 설렜다.
송혜교는 연기 톤이 매번 비슷하다는 둥 말이 많지만 여전한 멜로퀸이었다. 중요 장면에서 눈물 그렁그렁만 해도 납득이 되는 필살기를 지녔다. 그의 전성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장기용은 충분히 멋졌지만 미래에 성장할 모습이 더 기대되는 배우였다. 조연인 박효주, 최희서, 김주헌도 감탄하며 봤다. 영은과 재국의 찐멜로를 기대한 시청자들은 속았단 기분이 들 정도로 끝까지 아쉬웠을 것이다. 난 좋았다. 내 사랑 파리 몽마르뜨도 나오고 잔잔하게 사색하며 보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