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살 주말 라디오 조연출을 하던 때 알게 된 선배 감독님이 계신다. 선배는 참 인상도 좋으시고 함께 있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분이셨다.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그 어떤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보다 배우는 것도 많고 기분이 좋아졌다. 라디오가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매달 함께 업무 하는 분들이 바뀌는데 선배와 근무하는 날이란 걸 알게 되면 마음이 좋아졌다. 근무 초반 생방송이라 늘 긴장된 상태였지만 선배는 나의 긴장된 상태를 아셨는지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다양한 농담을 던져주셨다. 나중에 나도 업무가 익숙해지고 선배와 농담도 하며 가끔 쓸데없는 질문을 드렸는데 그때마다 바보 같은 질문에도 좋은 답변을 주어 내가 더 성장하게 해 주었다.
돌이켜 보았을 때 선배와 다른 어른들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결혼에 대해좋게 이야기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혼의 긍정적인 부분을 단지 자식 때문이 아닌 <좋은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기 때문이라 했다.
내가 보았던 대다수의 결혼한 분들은 결혼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다. 술자리에서 결혼 주제가 나오면 '결혼'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도리도리 하며 절대 하지 말라는 분들이 있었고 같이 있던 미혼들은 그들의 힘든 결혼생활을 다 듣고 힘내시라며 건배를 외쳤다.
난 그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왜일까 생각해보면 내가 그의 배우자가 되어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기분이 썩 좋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혼을 잘 한 이유가 '자식'뿐이라 말하는 것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자식만 없으면 원수 같은 사이란 것인가? 자식은 중학교만 되어도 부모의 품을 떠나려 한다. 나도 생각해보면 중학생 때부터 부모보단 친구들과 노는 것이 더 재미있었고 친구들이 내 세상의 전부였던 것 같다.물론 나이가 들어 철이 들었을 때 부모님을 챙기지만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다른 의미라 생각한다.
물론 본인의 배우자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고 어떠한 사연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나는 나중에 내 배우자가 나를 주변에 안 좋게 말하는 것과 그와 나의 결혼이 유지되는 이유는 자식 때문만이라고 말하는 것을 안 좋아하는 사람인 듯하다.
다시 선배 이야기로 돌아와서,
선배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해주셨는데 어느 날 선배와 선배의 아내 두 분이 집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아내분이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한다.
나 근데 요즘 친구가 너밖에 없다?
그러자 선배도 잠시 생각하더니 '나도 니가 베프지' 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아이를 키우고 바빠서 친구들을 잘 못 만났고 진짜 친구가 없는 것이 슬퍼서 하신 말 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에겐 퍽 아름답게 다가왔다. 부부가 인생 최고의 베프 상태라니.. 정말 아름다운 결혼생활이 아닐 수 없다.
결혼을 하기 전 '이 사람이 동성이었어도 내가 친구를 했을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누군가 말했다. 부부는 연애와 달리 이성적 매력으로만 함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 평생 룸메이트를 구하는 것이기에 이성적 매력이 모두 사라졌을 때에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난 이 말에 깊이 공감했다. 결혼해서는 생얼도 보여줄 테고 생리현상도 다 볼 텐데 이성적 매력이 10년, 20년 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성적 매력이 모두 사라지면 결국 남는 것은 인간적 매력이고 가치관이 같냐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물론 이성적 매력도 유지된다면 좋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