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후 연재] #02. 《비트겐슈타인 평전》리커버 개정판
1911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책을 쓰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에 대해 프레게와 논의하기 위하여 예나로 여행을 떠났다. 아마도 이 여행을 통해서 그 계획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항공학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를 알아보려 했을 것이다.
프레게는 비트겐슈타인을 격려하면서 케임브리지로 가서 러셀에게 배우라고 권했다. 이 충고는 프레게의 생각보다 더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러셀의 인생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선생이 필요하던 바로 그때 러셀에겐 제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가엘 학기(Michaelmas: 영국 대학의 가을 학기를 지칭한다. 봄 학기는 렌트 학기이다—옮긴이)가 시작되기 약 2주 전인 10월 18일 비트겐슈타인이 트리니티 칼리지의 러셀 방에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소개했을 때 러셀과 미리 약속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때 러셀은 오그던(C.K.Ogden: 후에 ≪논리철학논고≫를 최초로 영어로 옮긴 사람)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 낯선 독일인이 나타났습니다. 영어를 거의 못했지만 독일어로 말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알고 보니 샤를로텐부르크에서 공학을 공부하던 중 수리철학에 대한 열정이 생겨서 나에게 배우려고 막 케임브리지에 도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두 가지를 빼놓은 것은 놀랄 만하다. 첫째, 프레게가 러셀에게 가보라고 권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둘째, 그는 러셀에게 맨체스터에서 공학을 공부했다는 것(사실 공식적으로는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을 빠뜨렸다.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 이상을 뜻하는 것 같지는 않다. 러셀에게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줄 정도였다면, 그가 꽤 긴장했음은 틀림없다.
다음 몇 주 동안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는 단순히 러셀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러셀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서 자기가 철학적 재능이 있는지, 항공학 연구를 포기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를 한 번에 가장 확실한 권위자로부터 알아내려고 했던 것 같다.
러셀의 수리논리학 강의는 학생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다. 수강생이 세 사람 뿐인 경우도 자주 있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비트겐슈타인이 강의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을 알아채고 기뻐했을 만하다. 러셀은 "나의 독일 학생에게 관심이 아주 많으며 그를 자주 보기 바란다"고 오톨라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실제로 그는 비트겐슈타인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주 보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강의 중에는 거의 혼자 토론에 참여했고 강의가 끝나면 방에까지 쫓아가서 러셀을 괴롭혔다. 이에 대해 러셀은 호의적으로 흥미를 느끼기도 했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격분하기도 하는 등 복잡한 감정으로 반응했다.
독일인 학생이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에 따라와서 저녁 식사 때까지 논쟁을 했습니다. 완고하고 고집 세지만 멍청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1911년 10월 19일
나의 독일인 공학도는 논쟁을 매우 좋아해서 성가실 정도입니다. 그는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 그는 돌아와서 내가 옷을 입는 동안 내내 논쟁을 했습니다. - 1911년 11월 1일
내가 생각하기에 이 독일인 공학도는 바보입니다. 그는 경험적인 것은 아무것도 알려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에게 이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 1911년 11월 2일
비트겐슈타인은 주장된 명제들 외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 1911년 11월 7일
강의는 잘 시작되었습니다. 전직 공학도인 독일인 학생이 평상시처럼 세상에는 주장된 명제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논제를 내놓았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것은 너무 광범위한 주제라고 말했습니다. - 1911년
11월 13일
나의 성난 독일인이 강의가 끝난 후 와서 논쟁을 했습니다. 그는 합리적인 모든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장갑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와 얘기하는 것은 정말 시간낭비입니다. - 1911년 11월 16일
훗날 러셀은 이 당시에 토론했던 것들을 가지고 장난을 하곤 했는데, 비트겐슈타인에게 코뿔소가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강의실에 있는 모든 책상과 의자 밑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 문제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는 것, 코뿔소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것들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사실상 비트겐슈타인이 여기서 그처럼 완고하게 내놓고 있는 견해는 ≪논고≫의 유명한 첫째 명제인 "세계는 사물들이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이다"를 예상하게 한다.
위에 든 인용문들을 보면 러셀이 아직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능력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곧 비트겐슈타인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11월 27일 미가엘 학기가 끝났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묻기 위해 러셀을 찾아갔다. 이 의견은 비트겐슈타인이 할 일을 선택하게 하고, 2년여에 걸쳐 그를 괴롭혀왔던 관심사들의 충돌을 최종적으로 해결해줄 그런 것이었다.
나의 독일인 학생은 철학과 항공학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 자기가 철학에 완전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물어 왔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무언가를 써서 가져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돈이 있고 매우 열정적으로 철학에 흥미를 갖고 있지만, 철학에 재능이 없다면 인생을 철학을 하기 위해 보내서는 안 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정말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 1911년 11월 27일
케임브리지를 떠나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을 허물없이 만난 적이 있는데, 이때 그는 철학적 문제들에 몰두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러셀은 드디어 그가 독일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라는 것을, 그가 문학적이고 매우 음악적이며 쾌활하고 … 정말로 지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결과는 "나는 그를 좋아하고 있다"였다.
그러나 진짜 전환점은 비트겐슈타인이 방학 동안에 쓴 글을 가지고 1912년 1월에 케임브리지로 돌아왔을 때 이루어졌다. 그 글을 읽자마자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러셀의 태도가 즉시 바뀌었다. 러셀은 그 글은 "아주 좋았으며 영국 학생들의 글보다 훨씬 더 좋았다"고 오톨라인에게 말했다.
덧붙여서 그는 "나는 그를 확실히 격려할 것이다. 아마도 그는 위대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훗날 데이비드 핀센트(David Pinsent)에게 러셀의 격려는 구원이었으며, 9년 동안(이 동안 그는 자살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의 외로움과 고통을 끝나게 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마침내 공학을 포기하고 "자신이 이 세계의 군더더기라는 암시"—자살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든 바로 그것—를 떨쳐버릴 수 있었다.
러셀은 글자 뜻 그대로 비트겐슈타인의 생명을 구했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으로 하여금 공학을 포기하고 철학을 추구하려는 생각을 격려하고 정당화시켜줌으로써 말이다. 다음 학기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수리논리학을 아주 열심히 공부해서 학기가 끝날 무렵 러셀은 자신이 가르쳐야 하는 모든 것을 그가 배웠고 실제로 그 이상 나아갔다고 말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인생에서 큰 사건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아낍니다. 너무 늙어서 내가 풀 수 없는 문제들(내 연구가 제기하는 모든 종류의 문제들, 그러나 신선한 정신과 젊음의 활기를 요구하는 문제들)을 그가 풀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로 그런 젊은이입니다.
딱 한 학기를 지도한 후, 러셀은 그가 찾고 있던 제자의 모습을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찾아낸 것이다. 1912년 2월 1일,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을 지도교수로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으로 입학이 허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