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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픽 Aug 08. 2019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이유

서점가에 불고 있는 '한나 아렌트' 열풍을 보며

요즘 서점가에 때아닌 '한나 아렌트'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저작 《정신의 삶》,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한나 아렌트의 삶을 그래픽노블로 재조명한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철학자 이진우가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오늘의 쟁점에 적용해서 살펴본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등 서점가에도 아렌트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파헤친 철학자 '한나 아렌트'


유대계 독일인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철학자이자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 그녀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파헤친 위인으로 유명합니다.



아렌트의 학설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있는데, 스스로 사유할 권리를 포기하거나 박탈당한 채, 공적 영역에 들어서게 되면 사유하지 않는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가 지각없는 군중으로 전락하면서 전체주의가 자라나기 쉬운 토대가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등장하면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될 우려가 크다는 것입니다.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견해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면서 확립된 것입니다.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을 봤을 때, 아이히만은 정말 평범한 이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 채 "칸트가 말한 '복종의 의무'를 준수하며 살아왔다"면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아렌트는 여기서 '악의 평범성'을 깨닫고 사유 없는 맹목적인 순종이 한 인간과 집단을 어떻게 악으로 이끄는지 깨닫습니다. 그녀는 아이히만 재판 참관기를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로 묶어 발표합니다.


아이히만을 사악한 괴물이라고 한다면 어떤 면에서 그의 범죄를 용서해주는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 잠재적인 죄를 짓게 되지. 철저하게 사유하지 못한 죄. 슬픈 진실은 선과 악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사악한 일을 저지른다는 거야. - 켄 크림슈타인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228p


1975년 12월 4일, 한나 아렌트는 저작 활동에 열중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가 사망한 다음 날 아침, 자택 타자기 앞에서 그녀가 집필 중이던 책의 첫 문장이 발견됐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미완성 유고는 《정신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사후 출간됩니다.


한나는 무덤에서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한다. 복수성과 탄생성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이 비록 소풍 같지는 않겠지만, 아우슈비츠나 굴라크, 스톤월 항쟁, 폴 포트, 아티카, IS를 막으려면 인류라는 하나의 종으로서 그것을 포용하고 인내하는 수밖에 없다고. 즉, 세상에서 우리를 이끌어 줄 유일한 진리나 이해를 위한 묘책 같은 건 없다. 영광스럽고 결코 끝나지 않는 난장판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위한 끝없는 난장판 말이다. - 켄 크림슈타인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237p


왜 지금 아렌트인가?


그래픽노블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의 감수를 맡은 숭실대 철학과 김선욱 교수(한국아렌트학회 회장)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아렌트 사상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렌트 사상은 전체주의가 어떻게 우리 삶에 침투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주고, 시민운동의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하며, 억눌리고 소외당한 자들에 의한 정치와 그 가능성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 또한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깊은 성찰은 정치를 변모시킬 시민의식의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소통과 합의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이미 많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 켄 크림슈타인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5p


필로소픽에서도 작년에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다룬 마크 릴라의 《분별없는 열정》의 개정판을 번역·출간한 데 이어, 올해 하반기에 한나 아렌트의 미발표 저작 모음집 《책임과 판단》을 출간 준비 중입니다. 두 권 모두 한국아렌트학회 회장을 역임한 경희대 서유경 교수가 번역을 맡았습니다. (아렌트학회장을 역임한 분이 역자라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이 되겠죠 ^^)


지난해 출간된 《분별없는 열정》은 세계적인 정치철학자 마크 릴라가 '20세기 유럽의 탁월한 철학자들은 왜 전제 정치를 옹호했을까?'라는 화두를 던지며 하이데거, 슈미트, 벤야민, 푸코 등 20세기 유럽의 주요 지성들이 어쩌다 '전제 애호'의 길로 빠지게 되었는지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의 1장에서 나치 독일에 부역한 마르틴 하이데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하이데거와 지적·육체적 사랑에 빠졌던 아렌트와의 스캔들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라헬 파른하겐의 경구를 종종 인용했다. 파른하겐은 보수주의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폰 겐츠가 '진실에 대한 열정 때문에 허위를 포착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정확히 그런 시각으로 보았다. 자신이 사랑한 하이데거의 지적 열정, 그리고 하이데거가 명백한 진실과 명백한 허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그 위험성이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유를 진작시킨 열정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고 믿은 듯하다. - 마크 릴라 《분별없는 열정》 57~58p.


나치에 부역한 스승 하이데거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망명을 떠난 제자 아렌트가 평생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애증'의 관계였다는 점을 서로가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재조명한 부분들이 무척 흥미로웠지요.


현재 막바지 교정 작업 중인 《책임과 판단》은 아렌트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미발표된 강의록, 연설문, 논문 등의 글들을 모은 책입니다.


책에서 아렌트는 악의 본성과 도덕적 선택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특히 책의 핵심이 되는 <도덕철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에서 아렌트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판단 기준으로 전통적인 도덕적 진리가 부적합하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선과 악, 그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새롭게 연구합니다. 악의 본성에 대한 사유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악의 평범성을 설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보다 좀 더 심화된 사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렌트 열풍이 부는 지금, 아렌트 깊이 읽기에 도전해보는 것도 사유의 깊이를 파는 독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공공성'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던 한나 아렌트, 이제 그녀를 만나는 여행에 동참해보는 건 어떨까요?


[한나 아렌트를 이해하기 위해 읽으면 좋은 책들]


1. <분별없는 열정>, 마크 릴라 저, 서유경 역, 필로소픽.

2.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켄 크림슈타인 저, 최지원 역, 더숲.

3.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이진우 저,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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