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후 연재] 알렉산더 지의 <자전소설 쓰는 법> #01.
첫 소설은 비록 소설을 쓰는 것이 작가일지라도
그를 작가로 만들어주는 무엇이라고.
끝까지 완성할 정도로 애정을 쏟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01. '영혼'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사용하지 마세요
황금색 말보로 담배 필터에 동그랗게 립스틱 자국이 남는다.
나는 이것이 5분 후에 수업이 시작된다는 의미라는 걸 이내 알아차린다. 담배를 비벼 끄면서, 그녀가 피우고 남은 필터를 보관했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적어도 하나쯤은 간직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것을 발로 차 배수로 안으로 밀어 넣고 우쭐한 기분을 느낀다.
첫 강의에서 그녀는 진주 목걸이와 진주 귀고리를 하고 스웨터 위로 셔츠 옷깃이 살짝 드러나는 차림새였지만,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한방 날릴 기세였다. 그녀는 카우걸처럼 강의실 안을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메모를 잔뜩 끼적인 리걸 패드, 커피를 담은 보온병, 그리고 하나씩 포장된 브래치스 캐러멜 한 봉지를 가방에서 꺼낸 뒤 자리에 앉았다. 그런 다음 보온병 뚜껑을 신속하게 돌려 열고 뚜껑 겸 컵에다 커피를 붓고는, 한 모금 마시면서 우리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안녕. 그녀는 뭐랄까 미소 같은 걸 지으면서 인사했다.
130명이 수강 신청을 했고 그 가운데 열세 명을 선정했습니다.
정체불명의 탈락자들이 환영 같은 모습으로 잠시 우리 주변에 머물렀다.
자칫하면 우리 역시 그들 무리에 속했을 거라는 공포감이 스쳤다.
청강생은 받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누구든 예외 없이.
수업을 시작할 때 그녀는 커피를 담은 가늘고 긴 보온병을 열고, 낱개로 포장된 브래치스 캐러멜 ― 가운데가 하얀 걸로 ― 봉지를 뜯곤 했다. 메모를 잔뜩 써놓은 리걸 패드를 내려놓고, 커피를 따르고, 커피를 마시면서 캐러멜 포장을 벗기고 먹었다.
책상 위 그녀의 왼손 옆에는 비닐 포장지가 소복이 쌓였다. 그녀가 리걸 패드 페이지를 앞뒤로 휙휙 넘기면서 글쓰기에 관해 경구처럼 간결하고 날카롭게 말하면 비닐 포장지들이 가볍게 팔락거렸다. 그녀의 경구는 짧은 강의로 이어졌지만 이따금 목록으로 열거되기도 했다.
‘영혼’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사용하지 마세요, 가능하면 말이에요. 요약한답시고 절대로 대화를 인용하지 마세요. 사람이 모여 있는 장면 묘사는 피하세요, 특히 파티 장면.
그녀는 거의 졸린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난폭한 속도로 질주했다. 미친 듯이 내달리는 게 아니라 오페라처럼. 그런 뒤에 숨을 돌리며 잠시 고요히 자신의 노트를 확인하고, 그사이 우리가 필기를 마치느라 글씨 쓰는 소리가 잦아들면, 다른 주제로 강의를 이어 나갔다. 우리는 그 주의 과제를 받으면 2행간씩 띄워서 쓴 원고 일곱 장을 제출해야 했다.
2행간씩 띄우라고요?
그런 요구는 처음이라 첫 시간에 우리는 정확히 들었는지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여러분이 쓴 문장 사이에 내가 메모할 자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책 소개|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소설이 되는가
록산 게이가 극찬한 자전 소설 작법 이야기
《타임》, 《워싱턴포스트》, NPR을 비롯한 유력 매체 30여 곳으로부터 ‘최고의 책’으로 선정된 책. 특히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 록산 게이가 “글쓰기와 정체성,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미묘한 분위기의 세련된 에세이”로 찬사를 보낸 책. 첫 자전 소설 《에든버러》로 등장과 동시에 <퍼블리셔스 위클리 베스트 북>(2002년)을 수상하며 ‘대가의 반열에 오른’, ‘비교 불가능한 작가’로 언급된 작가 알렉산더 지가 그의 자전 소설 쓰기를 둘러싼 진솔한 이야기를 묶었다.
작가는 자전 소설 쓰기 방법을 그대로 설명하기보다는 자전 소설 쓰기의 과정 자체를 또 한 편의 자전 소설 형식을 빌려 보여주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다. 한국계 미국인이자 성소수자로서 겪은 이중차별과 성적 학대 경험을 고백하면서도 문학적 위트와 여유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글을 쓸 때에만 발견할 수 있는 삶의 의미와 정체성에 집중하며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글로써 삶과 정체성을 발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교하고도 시적인 문장으로 그린 이 에세이는 ‘자전 소설 작법에 대한 자전 소설’의 분위기를 풍기며 일종의 메타 픽션을 형성한다. 글쓰기에 관한 섬세한 은유가 녹아 있는 이 특별한 책은 이론 중심 작법서에 익숙한 독자와 작가 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며, 소설 쓰기를 시작한 작가지망생과 스토리텔링 아이디어를 끌어내려는 사람에게도 새로운 빛을 던져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