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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렇게 조금씩 Apr 10. 2023

바람개비와 함께 10km

2022 용안 바람레이스


 하루 전, 달릴 때 듣던 음악들이 질려 새로 리스트를 만들었다. 끝난 뒤 들릴 맛집도 알아봤다. 달리는 데에 좀 자신이 생겨서 여유만만이었다. 그럴 만도 했던 게, 내일 날씨는 맑을 예정이고 기온도 20도 정도니 달리기에 딱 안성맞춤이잖아. 더군다나 코스는 어떤가? 금강을 따라 한적한 둑길을 달리는 코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지에다 주로도 반환점을 빼고는 거의 직선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곧게 뻗는 길이다. 둑 위에서 논들을 내려다보며, 금강도 보며 바람개비가 가득한 길을 달리는 거라 풍경도 상당히 좋을 예정이다. 이 정도 마라톤이라면 어떤 러너도 걱정 없이 달릴 수 있지 않을까?(후후후.. 과연)


 두 번째 마라톤 대회인데도 벌써 긴장보다는 기대만 되는 걸 보니 김제에서의 마라톤 도전 스타트를 잘 끊은 것 같다. 김제 마라톤은 어느덧 2주가 지나 머릿속에는 10km 완주의 아름다운 기억만이 남아있었다. 분명 힘들다는 생각을 죽도록 했을 텐데, 그런 기억은 다 휘발되고 경기장에 들어서서 트랙을 밟는 느낌, 남은 힘을 써서 여유 있게(?) 결승선을 통과했던 추억만이 내 머릿속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리고 있었다.


 아침 8시, 용안으로 출발한다. 전주에서  1시간을 가야 하는 용안읍은 익산이지만 충남 강경과 맞닿은 작은 시골마을이다. 생태습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도, 바람개비 길이 있다는 것도 모두 처음이라 너무 기대가 된다. 전주에서 용안까지 가는 길도 여유롭고(무료도로로 검색해서 갔는데 오히려 평화롭고 좋았다) 도착해서도 안내요원분들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다. 배번이 현장배부라 운영본부에서 받아오는 길에 공원을 구경한다. 여기저기 꽃이 가득해서 절로 신이 난다.  


 차에서 배번 착용 후 초코바와 포카리스웨트를 좀 마셨다. 10분 남짓 차에 있었을 뿐인데 땀이 난다. 햇빛이 생각 외로 너무 따갑다. 햇빛 때문인지 음료수를 마셔도 계속 목이 마른 느낌이다. 계속 마시면 달릴 때 불편할 것 같아서 조금 참는다. 그나저나 선글라스를 가져와서 다행이지. 이번에는 선글라스를 계속 착용하고 달려야겠다. 10시 출발이라 달릴 때는 더 더울 것 같은데.. 약간 걱정되는 마음을 안고 대회장으로 나간다. 


 대회장으로 걸어가는 길, 배번 받을 때도 마주쳤던 두 명의 여성 러너를 다시 마주쳤다. 한 분이 경험자이신지 아까부터 옆 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 하며 듣게 된다. 나도 누군가와 같이 왔으면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을 텐데 좀 아쉽다(친구나 동생을 좀 더 꼬셔봐야지.. 매우 즐겁다는 얘기만 해야지.. 살도 잘 빠진다고 해야지.. 약간 사기를 좀 쳐봐야겠다). 경험자 분이 "나는 빨리 뛰려는 마음이 없어. 그냥 즐겁게 뛰는 거야."하고 얘기하셔서 나도 마음속으로는 같은 일행이 된 듯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치며 같이 걸어간다(그런데 즐겁게 뛰는 게 사실 제일 어렵다). 


 어느새 출발 시간이다. 모두 같이 준비운동도 마치고 출발선으로 이동한다. 이번엔 중간 조금 앞에서 출발한다. 저번에 뒤에서 출발하니까 걷는 사람들을 지나치는 게 조금 힘들었다. 딱 나와 비슷한 페이스를 가진 사람들이랑 뛰어야 좀 더 힘이 날 것 같아서 주변에 같이 달릴 마음속 러닝메이트들을 정한다. 출발!


 출발선을 통과해서 둑길로 올라가는 길, 모두가 힘차게 달리고 있다. 우와 진짜 날씨가 좋다. 그런데 달려도 달려도 1km가 나오지 않는다. 이번 대회는.. km를... 표시하지 않나? 싶을 때 1km 표지판이 나타난다. 원래 1km가 이렇게 길던가? 이때부터 뭔가 조금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컨디션이 급속도로 다운되기 시작했다. 마음속 러닝메이트들이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달리다 보니 11살 가장 어린 최연소 러너가 아빠와 뒤에서 달리고 있다(달리기 전 사회자 분 이벤트에서 듣고 알게 되었다). 약 1km 남짓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이 달렸는데 아빠가 옆에서 열심히 이런저런 얘기들로 아들을 응원하는 모습이 멋졌다. 그래 11살이 달리기엔 좀 힘들지. 꼬마가 애쓰네 싶어서 마음속으로 같이 응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꼬마가 "아빠 근데 나 더 빨리 달릴 수 있는데." 한다. 아빠가 "그래 대회니까 네가 달리는 속도로 달려야지." 하며 앞으로 가라고 한다. 아니.. 더 잘 달리는 쪽이 아이였어요? 저는 아빠가 아이 속도를 맞추고 있는 줄 알았어요!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나를 앞서서 죽 달려 나간다. 헐.. 젊음이 좋다는 게 이런 뜻인가요..(이 아이는 결국 나보다 먼저 들어와서 결승선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나도 첫째랑 나가면 이렇게 달릴 수 있을까? 너무 뿌듯할 것 같은데. 내 새로운 로망이 되었다. 몇 년뒤 아이와 같이 달리기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분명 김제마라톤은 힘들지만 할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내 기억 속의 미화였던가? 컨디션은 점점 난조를 띄고... 5km 반환점에서 이미 모든 체력을 쓴 느낌이 들었다. 남은 5km를 어떻게 달리지...라는 생각만 하고 뛰다가 결국 7km 이후에는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김제 때는 초심자의 행운과, 비가 오는 오히려 좋은 날씨 덕을 봤던 것 같다. 김제가 선녀였다. 찌는 듯한 햇빛을 정통으로 맞으며 달리기엔 둑길은 너무 힘들다. 둑길이라 위에서 바라보는 자연 풍경은 아름다웠던 것 같긴 한데... 바람개비도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솔직히 전혀 감동을 받지 못했다. 사람은 일단 목숨이 위태로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시멘트 바닥이란 원래 이리 단단한 것인가? 역시 요즘 아스팔트를 까는 이유가 있다.. 이런 생각 한번, 아 역시 체중감량을 더 해야 되나 라는 생각 한번 하며 겨우 결승점을 통과했다!! 진짜 이런 게 인간승리다. 기록은 2분 더 안 좋아졌다(이것으로 알 수 있다. 처음에 오버페이스를 했단 걸... 걷다 뛰다 했는데도 2분 오버면.. 이전에 조금 빨리 달린 듯). 처음 코스를 봤을 때 정말 직선코스에 오르막내리막도 거의 없어서 이번엔 1시간 안에 들어오나? 하고 김칫국을 들이켰었는데, 마라톤 초보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앞으로의 대회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대회는 400명 정도가 참가한 소규모대회지만 전체적으로 더 구석구석 신경 쓴 부분들이 느껴져서 행복했다. 달릴 때 더 즐겼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두 번밖에 없어서 비교하기가 부끄럽지만 김제는 격식 있는 중년의 공식 대회 느낌이라면 이제 막 2회 차가 된 이 대회는(원래 지역러닝크루들이 모여서 만들고 이후로 익산시와 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해서 2회를 열었다) 딱 그거다! 마라톤클럽과 러닝크루. 뭐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느낌! 가볍고 밝아서 즐거웠다.


 문화관광재단 이사장님은 이 대회를 크게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황영조선수도 초청하고 등등) 장소나 코스 길이(뭐 길이야 조정할 수 있겠지만..) 길 너비 등을 고려하면 그런 것보다는 지금 정도의 인원으로 개최해서 열고, 봄 여름 가을 이렇게 3번 정도 횟수를 늘리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이 길은 고즈넉하게 뛰는 게 더 아름다울 것 같다. 


 이번엔 더위와 시멘트둑길 콤보에 좀 난항을 겪었지만, 다음번이 또 있다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가야지. 오늘도 완주를 한 나 자신, 정말 장하다.



주차 : 대회 전날 주차공간이 협소하니 지인들이라면 같이 와달라는 안내문자를 받고 이번에도 1시간 전에 도착했다. 1시간 전에는 여유 있게 주차할 수 있었지만 딱 봐도 150대 이상 수용은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참가인원을 400명으로 제한해 놓았으니, 주차대란이 일어나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고 나중에도 차가 질서 정연하게 주차되었던 것을 보면 주차를 안내해 주신 봉사자분들께서 만차 후에는 다른 곳으로 주차 안내를 해주신 것 같다(나중에 블로그를 보니, 좀 떨어진 다른 곳에 주차한 후 대회장까지 셔틀을 운영했다는 듯. 여기저기 봉사자분이 많아서 불편하지 않았다.) 아무튼 일찍 도착해서 나쁠 건 없다.

기념품 : 운동용 티셔츠! 무려 내셔널지오그래픽 티셔츠인데 6만 원이 넘는 가격표가 붙어있어서 좀 놀랐다. 참가비는 2만 원이었는데! 도로이용로가 빠지니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익산시에서도 지원을 좀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먹을거리는 완주 후에 주는 쿠폰으로 커피(커피차가 와있다!)와 인근 두 마을(용머리고을, 성당포구마을)에서 각각에서 직접 만드신 주먹밥과 식혜를 먹을 수 있었다. 스티로폼박스에 보관해 주신 주먹밥은 너무 따뜻하고 맛있었고, 식혜는 떨어져서 아쉽게도 먹지 못했다(엉엉). 너무 맛있을 거 같았는데..

10km 코스 :  나는 무분별한 도로개발 및 아스팔트 포장을 혐오하는 쪽이지만 확실히 달리기 초보자에 과체중 러너에겐 9km 내내 시멘트길은 좀 힘들었다(나머지는 공원 안쪽 산책용 포장도로를 달린다). 분명히 얘기하지만 다음에 이 마라톤을 달릴 때 아스팔트 길을 달리길 원하는 건 아니다. 이 코스의 정취에는 시멘트길이 아주 딱이다. 그냥 다음엔 다리 힘을 더 키우고, 쿠션이 좋은 운동화를 신고 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외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치도 아름답고 평지에 직선 주로라 코스 자체의 난이도는 없다. 그래서 즐기며 달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관광 : 용안생태습지공원에는 꽃이 한가득 피어있었다. 여기만 구경하러 올 가치가 있을 정도로 한가롭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다음엔 날을 잡고 공원을 달리러 와도 너무 좋을 것 같다. 근처에 성당포구 금강체험관에 야영장과 숙소가 있고 여름엔 물놀이장도 운영한다고 들어서, 여름에 한번 아이들과 오고 싶어 졌다. 자전거를 타시는 분들 사이에선 이 길이 이미 유명한 것 같았는데 내가 달렸던 길을 따라 금강 하구둑으로까지도 달리는  같다. 정취가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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