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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진 Apr 06. 2018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으로 종교 비평하기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무자비한 세상의 본질이며, 심장 없는 세계의 심장인 동시에 정신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그것은 민중의 아편이다. 민중의 환상적인 행복인 종교를 폐기하는 것은 민중의 현실적인 행복을 요구하는 일이다. 민중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 그리는 환상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버리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를 후광으로 하는 고통스러운 세계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언젠가 마르크스는 헤겔의 <법철학 강요>를 비평하면서 위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 유명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Religion ist das Opium des Volkes)’라는 말로 요약되는 이것은, 그가 단순히 종교를 저주하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도 아니었을뿐더러, 고통에 절어 아편이 주는 일시적인 위안에나마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아편은 중독성이 심한 마약이니 끊으라'라고 말하는, 그런 세상 물정 모르는 무자비한 원칙론자도 아니었다. 아편을 끊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싫어했던 것은 종교적 행위를 계속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우리 인간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의 조건들이었다. 다시 말해 종교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종교에 매달리게 만든 사회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 감독 스스로 자신의 영화는 반기독교적인 영화가 아니, 오히려 스스로 신을 해석하고 행동한 여주인공 신애에 대한 비판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고 밝혔던 바와는 달리 반종교적이면서도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을 만한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정작 피해자인 자신이 아직 가해자를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먼저 용서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럴 권리는 신에게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은 그것마저 빼앗아 가버렸다'라고 울부짖던 신애의 이 말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반종교적 메시지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핵심이다. 고통, 분노, 용서, 사랑이니 하는 인간의 격정들은, 온전히 인간들로부터 빚어지 인간들에게서 그 매듭이 지어져야 할 인간들의 몫이었다. 여기에 신이 개입할 여지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신을 믿고 추종하는 이들, 피해자에게는 용서를, 가해자에게는 구원을 종용하여 인간에게서 마땅히 재단되었어야 할 현실 자체를 왜곡하고, 나아가 정의로써 결정지어져야 할 인관계마저 역전시키고 말았다. 사실 애초에 신이라존재, 차마 인간으로서 짊어지기엔 너무나 버거웠 몫들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위안을 얻고 싶었던 데에서 탄생한 아편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애 구원을 얻고자 발버둥쳤고, 끝내 상처만 남긴 채 좌절하고 만 것이다. 결국 아편이란 고통을 일시적으로 덜어 내줄 뿐이지, 고통의 원인 자체를 제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청준, <벌레 이야기>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인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와의 차이점도 주목해볼 만하다.  본래 서술자 역할에 지나지 않던 인물인 남편이 영화에서는 사별한 것으로 설정되었고, 대신 여주인공인 신애에게 반향反響하지도 않는 사랑을 쏟으며 그녀의 곁을 맴도는 종찬이라는 인물을 추가한 점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아이 정도로만 간단히 묘사되던 아들 알암과는 달리 영화에서의 ‘은 엄마와 즐겁게 노는 장면 등이 묘사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애에게 있어 아들이란 곧 삶의 이유와 원동력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끔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오직 인간만이 인간의 상처와 고통을 조금이라도 보듬어주고 치유해줄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인간들이 부대끼며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 (종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쇠사슬에 나 있는 상상 속의 꽃들을 잡아 뽑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이 쇠사슬을 아무런 환상이나 위안 없이 견디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쇠사슬을 벗어던지고 살아있는 진짜 꽃을 잡게 하기 위해서이다.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인간을 미몽에서 깨어나게 만들어, 환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각을 회복한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여 자신의 실체를 변화시킴으로써 스스로 진정한 태양 아래로 걸어 나올 수 있게 한다.


 다시 한 번 마르크스를 인용해보자. 이는 처음 인용했던 내용과 이어지면서, 인간을 미혹하는 종교의 타파를 역설하는 대목이다.  특히 '스스로 진정한 태양 아래로 걸어 나올 수 있게 한다.'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태양’이 곧 '종교의 미몽에서 벗어남'을 대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작중에서 그 어떤 장소도 불문하고 단지 언제나 내리쬐고 있을 뿐이었던 '햇빛', 즉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밀양密陽의 의미를 달리 해석해볼 수 있게 된다. 통상적으로는 '신의 은총'이나 '희망의 줄기' 따위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으나, 이때의 햇빛은 단지 그 어떤 환상에도 미혹되지 않은 인간의 현실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다시 말해 햇빛이란 곧 '가감 없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태양으로부터 비롯된 이며, 신애는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태양(햇빛)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억지로 그것을 외면해보려 했지만, 그것은 단지 어느 곳, 어느 때에도 그저 한결같이 덤덤하고도 비밀스럽게 내리쬐고 있었을 따름이었다는 것이다. 햇빛이란 보통 따스하고도 포근한 것이지만, 때로는 따갑다거나 사뭇 서글프게도 느껴지는 때도 있기 마련이다. 영화의 중간마다, 특히 마지막 장면 즈음에서 신애의 옆을 가만히 비추고 있었던 그 햇빛은, 처한 현실이 한없이 고통스럽고 잔혹할지라도 차마 그것을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그런 인간의 '살아있는 진짜 꽃'을 잡기 위한 힘겨운 걸음걸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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