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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진 Apr 10. 2018

무엇이 '악'인가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적폐 청산' 기조의 논리적 근거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자상하고 상냥한 아버지였고, 사랑스러운 남편이었다. 또한 부지런한 일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하는 일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그 일이란 다름 아닌 유태인을 학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로 그는 악명 높던 나치 독일의 부역자였다. 결국 그는 나치가 패망한 이후 전범 재판 과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고, 아래와 같은 말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저는 위에서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가족을 위해서 일했을 뿐입니다. 저는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 유태인을 죽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유태인을 죽이라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저도 유태인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유태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상사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이 이야기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정보부에게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 1961년 12월, ‘한나 아렌트’라는 한 철학자가 그 재판을 직접 재판정에서 지켜본 후 작성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는 1963년에 출판되어 큰 논쟁거리가 된 바 있는데, 아렌트는 피고석의 아이히만을 보면서 실제로 그가 저질렀던 악행에 비하면 너무나도 평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피에 굶주린 악귀도, 냉혹한 악당도 아니었다.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중년 남성이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는 전혀 별스런 인간이 아니었으며, 딱히 어떤 이념에 광분해 있지도 않았다. 단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을 뿐이었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던 그는, 심지어 칸트마저 인용하면서 명령은 지키는 것이 도리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 명령이 수백만의 죄 없는 인간을 무참히 살육하는 것이었음에도 말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과 자신의 책임을 전혀 연결 짓지 못하고, 그저 사람 좋은 웃음만을 지었다던 아이히만에게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낸다. ‘악’이란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에 존재하는데, 단지 그것을 행할 어떤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바로 ‘생각’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나 하나만’이라는 생각, 혹은 ‘누구나 그래’라는 핑계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는 순간, 평범했던 그 누구라도 악을 행할 수 있게 된다.


 이 일화를 통해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통념적인 수준의 윤리 · 도덕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 실천의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선의 가치를 추구하려고 노력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올바른 것으로라도 인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선을 스스로의 삶에 체화體化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다면, 막상 좀처럼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가족들에게 자상하고 헌신적인 것? 주어진 과업을 성심성의껏 행하는 것? 아마도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위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일화는 우리에게 생각 없이 사는 것이 곧 악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처럼 지난 인류사에서의 사례들을 통해서 보건대, 마땅한 악을 그저 관망하기만 하는 것도 곧 악을 조장하거나 동조하는 행위와 별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방관이 곧 동조'라는 논리가 결코 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적 무관심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 없는 거부감을 핑계로, 쿨한 척 우리를 둘러싼 문제들을 외면하고 치열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이 곧 악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행위임을 알 필요가 있다.  

 근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위 '적폐 청산'의 기조를 둘러싼 마찰도 그러한 맥락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더 이상 방치하면 국가와 사회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 만큼 곯아가고 있던, 그간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려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마땅히 정의로운 행위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곳곳에서 격렬한 반동의 조짐이 읽히는 것은 그만큼 악이란 실로 강력하고도 공고한 지반 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를 둘러싼 정치 및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투신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두고 같잖다는 듯 냉소를 보내며 '운동권', '빨갱이', '좌빨' 등의 공작工作된 단어로 매도하던,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만둔 이들이 빚어낸 참극이자, '적폐'라는 단어가 가리키고 있는 바의 실체라고도 할 수 있다. 악이란 실로 평범한 것이었다는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니체의 그 유명한 경구를 다시금 곱씹어볼 때다.


 지금껏 정의를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이들이, 그 원대한 계획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악에게 패배하고 말았던 것은 강도 높은 자기검열 때문이었다. 이들은 매 순간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엄격히 적용하고자 한다. 혹여 무고한 사람들까지 희생시키는 마녀사냥이 되는 것은 아닐지, 앞뒤 꽉 막힌 원리원칙주의자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지, 그토록 자신들이 퇴치하고자 했었던 심연의 괴물과 똑같이 되어버리고 마는 건 아닐지 끊임없이 반추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지극히 옳은 행위이다. 실제로도 그런 괴물이 되어버리고 마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누구도 그런 복잡한 사정까지 고려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는 일종의 약점으로 작용하고 만다. 악을 행하는 이들은 이러한 잣대에서 상대적으로 얽매일 것이 없는 자유로운 입장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결정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힘의 균형의 문제로, 지금까지 인류는 완전히 판 자체를 뒤엎는 혁명이나 전쟁 따위의  극단적인 수단이 아니고서는 이렇다 할 개선改善의 역사를 이룩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항상 인류 사회는 점진적으로 진보해 나갈 것이라는 낙관과는 달리, 실제로는 약간의 개선과 그것을 상회하는 악화를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한계에 봉착하면 어떤 계기로든 불길에 휩싸이고, 그 잿더미에서 새로 탄생하여 시작하는 것이 수레바퀴처럼 반복되어왔다.  

 그래서 어쩌면 - 정말로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사회에 어떤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고 싶다면 - 때로는 무관용적이고도 강력한 추력이 동원되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똘레랑스(관용)는 앵똘레랑스(불관용)에 대한 단호한 앵똘레랑스가 전제되어야만이 비로소 실현 가능한 바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그 유명한 경구처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법이겠으나, 현실적으로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단 어떤 형태로든 그 괴물을 상회하는 힘을 가져야만 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상대가 아무리 저급해도 누군들 품위 있게 가고 싶지 않겠냐마는, 그러기가 정말로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앞으로 한국 사회의 적폐 청산 움직임이 얼마나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느냐는, 이러한 고민거리를 두고 치열하게 고찰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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