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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인석 Jan 11. 2019

PPT템플릿, 절대 찾지 마라.

파워포인트에 대한 오해, 적극 해명을 위한 서론

새로이 시작하는 프레젠테이션 매거진의 첫 글감으로 무엇을 선택할까 고민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해보며 검색을 해보니 너무나 훌륭한 선배님들의 콘텐츠가 인터넷 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과감히 PPT 테크닉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프레젠테이션(또는 어떤 문서)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 원칙, 일종의 철학 같은 것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서고 나면 디자인은 생각보다 쉬운 문제가 될 테니.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되는 매거진이 되도록 필력을 모아보자 아자잣!


모눈종이가 생각을 가둬버린다고?


나는 현재 프레젠테이션 컨설팅 및 디자인을 업으로 벌써 4년째 살아오고 있지만, 앞서서는 마케팅을 7년 했고 대학에서는 건축을 전공했다. 얼핏 보면 맥락 없는 이 흐름 속에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3가지 분야 모두 "자신의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 이야기의 매력을 더하는 고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익혔던 툴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일련의 과정에서 첫 번째 단추였던 건축학부생 시절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다.


1학년 학부생의 건축 수업이란 상당히 단조로웠다. 넓은 도면대 위에 A1 용지를 펼쳐놓고 자 없이도 곧은 직선을 그리는 연습 따위를 몇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해야 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은 참 따분했고,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곧 졸업은 앞둔 선배들의 졸업 작품을 돕는 일이었다. 도면을 보고 모형을 만들고 이런저런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밤엔 야식 얻어먹고 하는 것이 학부 수업보다 더 흥미로웠던 시간이었다. 물론 나는 그마저도 대단히 성실하게 하지도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설계실에 불려 가 예리한 칼질과 본드칠을 하며 잡담을 나누던 시간은 큰 추억으로 남아있다.


건축이란 재밌는 세계다. 나의 재능을 일찍이 깨닫고 내려놓긴 했지만.


드디어 건축설계 시간에 아주 간단한 주제의 설계를 시도하는 과제가 주어졌을 때, 우리 새내기들은 다들 인상을 팍 쓰고 건축가가 이미 된 마냥 스테들러 홀더펜을 손 위에서 굴려가며 스케치를 했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선배가 한마디를 툭 던졌는데, 지금껏 생각해도 명치를 때리는 뼈 굵은 조언이 아니었나 싶다. "야, 설계를 할 때 모눈종이는 쓰지 마. 모눈종이는 생각을 가둬버리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간지러운 멘트를 했던, 커다란 존재였던 형들이 서른도 안된 애들이었음을 되새김질해보니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도 진지하게 와 닿았던 충고. 모눈종이가 생각을 가둬버린다. 오늘 템플릿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한 문장에 다 들어있다.   


템플릿의 역습, 강박의 시작


PPT로 문서를 만들어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하는 첫 번째 행동은 바로 '템플릿을 찾는 것'이다. 사업계획서 양식, 마케팅 사례발표, 제안서 양식, 보고서 양식 등 찾는 양식들도 가지 각색이다. 잘 만들어진 템플릿을 찾거나, 비슷한 타이틀의 문서 사례를 찾거나. 그럴듯하게 꾸며지고 자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의 문서를 찾으면 그제야 내용 채우기에 들어간다. 이런 경험들이 있다면 반드시 동반하는 또 하나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기대만큼 멋진 문서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멋진 샘플이 눈앞에 있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고 퀄리티도 마음에 들지 않을까? 그것은 템플릿이 나에게 '생각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오늘자 연관검색어. 얼마나 찾아 헤매는지 느껴지는 흔적들.


잘 디자인된 템플릿과 템플릿 안의 타이틀들은 일단 다 채워야 할 것 같은 강박을 기본적으로 준다. 이는 자신의 작성 목적에는 필요가 없는 내용조차도 작성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3개 요소를 표현한 템플릿 페이지가 있다면 내가 할 이야기는 2개뿐인데도 굳이 3개를 맞추어 낸다. 이렇게 억지로 짜낸 자투리 하나는 사실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SWOT 분석 템플릿 같은 것은 괜히 쓰잘데 없는 이야기를 채워 넣는다. 5단계 계획 템플릿은 내 머릿속 3단계를 억지로 찢어 놓는다.  이렇듯 PPT 템플릿은 건축설계 시간의 모눈종이처럼 나의 생각을 오히려 옥죄는 틀이 되고 마는 것이다.


벚꽃 템플릿, 도라에몽 템플릿. 어디다 쓸래?


또 하나, 시각적인 것에 너무 현혹되게 만드는 것이 템플릿이다. 템플릿을 찾다 보면 보통 보이는 썸네일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한두 개를 받고 끝내는 경우가 없다. 오 이것도 예쁜데? 이것도 일단 받아두면 쓸 날이 있겠지. 와 정말 예쁘다! 요즈음은 정말 많은 블로그와 각종 이미지 라이브러리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템플릿도 많아서, 템플릿을 찾다 보면 그 찾는 시간 또한 적잖이 사용하게 된다. 


구글에서 검색되는 예쁜 PPT 템플릿들. 귀여운 캐릭터와 파스텔톤의 향연.


작업 소스들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바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쟁여놓은 그 예쁜 템플릿들 딱히 쓸 일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내용보다는 예쁘게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디자인된 템플릿들이 더욱 그러하다. 봄이 되면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벚꽃 테마 템플릿, 각종 캐릭터를 모티브로 한 템플릿. 도대체 그 예쁜 PPT를 어디에다 쓸 것인가! 비즈니스 레벨에서는 사실상 전혀 쓸 일이 없을 테고, 대학 레벨에서의 발표자료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벚꽃에 대한 발표, 도라에몽에 대해 발표하는 게 아닌 이상 보기만 좋은 그런 템플릿들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내가 담고자 하는 메시지와 연결되는 시각적 임팩트가 아닌 이상 모두 불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독자분들께서 '아니 이양반, 템플릿 한 장 내어놓지 않으면서 참 말 많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우연히 정말 합이 잘 맞는 템플릿을 발견해서 일이 빠르게 끝나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으므로 전체를 부인할 용기는 없으나, 무튼 템플릿을 굳이 찾지 마시라.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 한 문장이다. 내 이야기의 뼈대를 텍스트로 완성하는 것이 멋진 PPT 문서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현대카드의 PPT금지령?, 아마존의 쿨함

PPT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항상 같이 따라오는 회사가 있다. 회사 차원에서 PPT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는 '현대카드'. 일을 간결하게, 핵심만 보고 하자는 그 방향성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겠으나! 그래서 고른 선택이 일단 전면적인 PPT 폐지(심지어 뷰어만 남겨놓는다고?)라는 게 조금은 의아하다. PPT가 무슨 죄가 있을까? (정태영 부회장의 선택 : https://www.insight.co.kr/news/165258)


실제로 내부에서 PPT 폐지 이후 오히려 워드나 엑셀로 PPT 같은 문서를 만드느라 죽을 맛이었다는 실무자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김태강님의 글 참조 : https://brunch.co.kr/@taekangk/44) 물론 이 또한 4년도 더 된 이야기라고 하니 지금은 처음 의도대로 본질에 집중하는 사내 문화가 깃들었기를 바라본다. 


또 요즈음 많이 눈에 띄는 아마존 뉴스가 있다. 아마존은 동일한 방향성을 가지고 조금 다른 방식을 적용했다. 바로 텍스트 온리. 무조건 완성형의 문장 6페이지 이하로 정리하고 커뮤니케이션한다는 것이다. 역시 글로벌 시총 1위는 다르다!라고 생각했다. PPT 폐지와 텍스트 온리. 분명 비슷한 의도에서의 출발이지만 제법 다른 선택이다. (아마존의 6쪽 메모 커뮤니케이션 관련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25&aid=0002876724&fbclid=IwAR3FmoSWlykSY2rK0q10zZ80uDHeO8pqbh4BuWkztTF4ceznEwIB6Od9dqk


사실 완결형 문장으로 특정 내용을 표현하고 정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텍스트로 정리하라고 하면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의외로 썼다 지웠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수정하고 삭제하고. 과정은 제법 괴롭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정말로 '본질'만이 남겨진다. 그것으로 상대방이 이해된다면 가장 완벽한 설명이 된다. 그림 한 장 없는데 설명이 된다는 것만큼 투명한 게 있을까?


아마존도 사실 조금 과한 측면은 있다. 나는 사진부터 그래픽, 영상까지 툴을 제법 다양하게 다루는 편인데, 그중에서 PPT는 정말 정보 비주얼 라이징 관점에서 가장 쉬운 툴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널리 쓰이는 툴이 아니겠는가. 이 툴을 잠궈버리기 보다는 어떻게 쓸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긴 문장보다 딱 하나의 그래프로 표현되는 정보도 있는 법이니까. 아마존도 한 고집 한다는 생각은 든다.


그래도 아마존은 PPT 템플릿의 강박, 디자인에 대한 강박을 잘 캐치해 낸 처사라는 생각은 든다. 그 툴을 금지하는 것 이상으로, PPT디자인의 균형감과 템플릿의 빈칸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습성을 차단하기 위해 '텍스트로만' 커뮤니케이션한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렇듯 본질은 결국 몇 줄의 '글'에 있다.


그래서 어떻게 만들라는 것인가?


내가 프레젠테이션 및 모든 문서 유형의 시각화 작업 시에 반드시 거치는 단계는 텍스트의 정리다. 어떤 인풋이던 해당 내용을 스터디하고 나면 백지의 노트를 펼친다. PPT 작업은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PPT 디자인으로 결국 먹고사는 사람이 글 타령이라니. 다소 밥줄을 끊는 이상한 글인 것 같지만 좋은 문서의 시작은 분명 그 청사진에 있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일단 여기서 한번 쉼표를 찍고자 한다. 분명한 것은 원페이퍼로 정리된 텍스트가 결국 로드맵이 되고, PPT 작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 외 비주얼적인 테크닉은 세모 네모를 그릴 줄 아는 수준이면 충분하다. 너무 서론을 길게 풀어쓴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 뒤늦게 들지만, 다음번에는 어떤 플로우로 작업하는 것이 효율적인 문서를 만드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기로!



고인석 
원포인트 프레젠테이션 대표이자 딸바보 아빠.
마케팅 팟캐스트 돌팔지마 공동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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