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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인석 Apr 02. 2019

일만 하다가 좀비가 된 썰

Walking Dead 말고, Working Dead가 되어버린 사연

정신을 차려보니 4월이다. 나의 춘삼월은 어떻게 지나갔던가. 정말로 공허하게 지나고 말았다. 아주 미치도록 바빴기에 오히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조금 일찍 눈이 떠진 아침,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볕을 일부러 피하지 않고 광합성을 하며 자판을 두드린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이제야 조금씩 든다. 세상에... 난 한 달 동안 뭐였던 걸까? 


적당히를 모르고 결국 좀비가 되었다


지난 한 달간의 나를 정의할만한 적당한 단어를 발견했다. 바로 '좀비'다. 감정도 없으며, 죽지도 않으며, 맹목적인 목적을 가지고 덤벼드는, 생명체라고 하기는 반쯤 죽어있는 썸띵. 다만 그 목적이라는 것이 '일'이었다는 것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워커홀릭은 귀엽다. 워킹좀비다. 세상에. 끔찍하다!


2월 말에 제법 큰 프로젝트가 하나 계약이 되었고, 사실 그것 하나만 해도 3월 매출이 부족하진 않은 달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존 거래선들에서 오는 요청들을, 마치 내가 해주지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되는 게 절대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을(정확히는 그들과의 거래관계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들어오는 일을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혼자 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고도 남았기에, 작업 서브 파트너를 아예 기간제로 고용하였다. 사실 숙련도가 부족한 파트너임을 알면서도, 그가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위안하며 들어오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나는 파국으로 치닫는 한 달을 살아내야 했다.


평균적인 수면시간은 채 서너 시간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보통 딸을 재우고 다시 일어나 일을 하다가 새벽 네다섯 시까지 일을 했다. 편히 아침까지 잤으면 좋으련만, 불안한 마음에 보통 6시 즈음이면 다시 눈을 떠 클라이언트가 출근하기 전까지 제법 진도를 빼두고 아침에 짠- 하고 메일을 보내 두었다. 점점 표정은 사라졌고, 아내는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질린다'라고 할 만큼 일만 했다. 지금 따져보니 총 13건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일이 익숙해지다 보니 내가 지금 머리를 써서 일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손이, 눈이, 이 감각적인 정보들이 그대로 아웃풋으로 치환되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나를 완전히 소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 이미 3월 중순 경이였지만, 이미 들어온 일들을 팽개칠 수도 없었고 일단 빨리 끝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자 몸은 고장이 났고 대상포진에 구내염에 병이 차례로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차라리 굉장히 아팠으면 프로젝트 포기라도 했을 텐데, 견딜만한 고통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긋히 잔잔한 고통 속에서 계속 일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새벽, 스스로 탄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 나는 좀비구나. 워킹데드. Walking Dead 말고,  더 불쌍하게도 Working Dead.



일의 목적,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내가 이 업계에서 S급은 아니지만, 저렴한 단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님에도 끊임없이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달란트를 가지고 있음은 다행스럽고 대견한 일이다. 이 재능을 완전히 상품화에 성공한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지금(오전 8시 30분) 이미 만원 전철에서 타인의 온기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출근하던 일상에 한치의 변화도 없었을테니.(아! 이게 더 나은가?) 무튼 조금 다른, 비교적 흔치 않은 삶의 형태로 다채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야 정신이 제대로 돌아온 4월에 생각해보니, 3월에 일하는 동안 즐거움이 있었는가에 대해 반문하게 된다. 나는 일에서 어떤 성취를 얻었던가. 나에게 남아있는 목적을 미사여구를 걷어내고 생각해보니 결국 '돈'밖에 남지 않았다. 슬프다. 오직 그것 때문이라면 독립하며 거창하게 떠들어댔던 것과 괴리가 크다. 


미친듯한 일의 스트레스에 한참을 날카로워져 있던 3월 후반의 어느 날, 아내는 나에게 자신이 불행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입장을 바꿔보면 당연하다. 좀비랑 살면 행복하지 않겠지. 클라이언트의 사무실에서 회의를 마치고 바로 옆 작업공간에서 또 투덜거리며 일을 하려던 때였다. 카톡 창에서 진지하게 울려오는 아내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뭣하러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걸까 싶었다.


맨날 바삐 사는 나에게 이제 많은 지인들이 똑같은 충고를 한다. 좀 더 너그러워지라고. 쉬엄쉬엄 해도 너의 안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 짧지 않은 시간을 증명했다고 말이다. 나도 알고 있다. 항상 그렇게 되새김질은 해본다. 그런데도 난 왜 적당히가 안될까. 


이참에 수주 단가를 더 올리는 것도 대안인데, 이제 시장의 경쟁 가격을 충분히 학습한 만큼 그것도 여의치는 않다. 나는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포지션을 알게 되었고, 마케터로서 살아온 짧지 않은 시간이 나를 굳이 대단한 모험보다는 안전한 매출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럴 거면 애초에 투덜 대지를 말아라. 어쩌란 거야. 하하.


여유를 찾은 4월. 딸내미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작업 중인 아내를 방에 두고, 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정리를 좀 했다. 간단히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어볼까.. 하며 부스락 거리다가, 시계를 보니 문득 나른한 시간이겠다 싶었다. 아내에게 가서 '커피 한잔 타 줄까?'라고 물으니 아내의 표정이 이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 좀비가 되었던 나의 심장에도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아내와 딸의 웃음은 내 삶의 가장 큰 목적이다. 적어도 저 미소를 잃지 않을 만큼의 일을 하면 되는 건데. 하하 참.



다시 원점.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내기 위한 실험


바쁘다고 엄살떤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다. 항상 이렇게 정신이 들 때마다 다짐했던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은, 그것들이 당장 수익화를 장담할 수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각오는 조금 다르다. 내가 좀비가 되고, 아내가 불행해지는 비극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다. 나에게 정말 역대급으로 힘든 한 달이었고, 정말 병이 날만큼의 강도였다. 이제 미뤄왔던 것을 먼저 하는 봄을 맞이해보려고 한다. 이것들이 꽃망울을 틔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이 좁은 책상에서 나와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련다. 글로 내뱉어 공개된 약속을 해두어야겠다.


첫째, 1인기업가를 탈출할 본격적인 구조화를 시작한다. 당장 내 수익이 안될지라도 작은 조직을 구축하는 것으로 일의 부담을 축소하는 구조를 반드시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 때마침 손에 주어진 대안과 옵션들이 있으니 모두 길을 두드려 봐야겠다. 


둘째, 남몰래 아주 조금씩 쌓아 올리고 있던 육아 콘텐츠를 본격적으로 포장해서 풀어내어 봐야겠다. 유튜브, 팟캐스트, 브런치, 인스타그램, 블로그. 다양한 플랫폼의 맛은 충분히 봤다. 어떻게 연결하고 조합해야 성과가 날지 실험하는 봄으로 만들어야겠다. 아마도 이것은 더 늦으면 할 수도 없는 일이니.. 미룰 만큼 미뤘다. 



퇴사 후 독립을 꿈꾸는 분들, 저처럼 되지 마세요.


누군가는 먹고살만한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말하긴 하지만, 회사 밖이 지옥이라고 믿었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 공포는 사실 실체가 없다고 생각한다. 회사와 철학을 같이 하고, 그 철학이 숨 쉬는 조직에서 헤드로 나아가겠다는 꿈 또한 대단히 멋지다. 그러나 그게 아니어서 나오는 거라면, 생각보다 바깥 생활도 할 만은 하다.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무 쫄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프리랜서 또는 1인기업가로서 적합한 마인드가 있고, 성실하게 미션을 클리어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일꾼 마인드가 있는 것 같다. 사업가 마인드는 또 조금 다르고. 나는 4년째인데도 결국 1인기업가 마인드는 못되었다 싶다. 대담한 여유를 즐길 줄 모르기 때문. 지금껏 살아보니 바뀌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쫄보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여유를 만들줄 모르는 경우 저처럼 좀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싶다.(하하...) 대안을 만들어가야만 하고 다 놓고 쉴 줄 아는 대담함도 있어야 한다. 놀 줄도 모르는데다가 대안을 만들어 놓고 떠드는 글이 아니라 죄송;; 하지만, 이번 봄 만큼은 꼭 대안 실험을 해보고 나서 그 후기를 전할 수 있도록 하겠다. 회사에서 파는 것보다 바깥에서 파는 게 더 가치 있는 재능을 발견했다면! 독립을 꿈꿔 보되, 꼭 자신만이 숨 쉴 수 있는 여백, 그 기준을 잘 지킬 수 있는 캐릭터 인지도 따져보시길. 안 그럼 워킹데드(Working Dead) 한순간임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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