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치료의 효과
얼마 전, 고된 검토서 작업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
인사가 제목이었다. 알림 창에 뜬 미리 보기 내용을 보니 지난해같이 번역 아카데미 수업을 들었던 동기가 보낸 메일이었다. 나와 똑같이 작년 1년 동안 입문, 실전, 심화반을 모두 수료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현장 강의가 온라인 강의와 줌으로 대체되면서 캠 화면 외에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해 본 적이 없는 분이었다. 그저 생김새나 간략한 자기소개를 통해 내 기수 중 유일한 또래라는 것만 알뿐. 반가우면서도 너무 생각지도 못한 메일이라 놀란 마음에 바로 메일을 확인했다. 동기 M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종강 이후 벌써 반년이 지났더라.
나이도 비슷하고 퇴사 후 번역 일에 뛰어든 것 같아서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더라. 자기도 검토서 작업 몇 차례하고 샘플 테스트도 했는데 쉽지 않더라.
본업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경제적인 면에서 타격이 생각보다 크더라. 계속 이 길로 가는 게 맞는지, 정말 젊은 나이에 본업으로 하기에는 리스크가 큰 직업인지 고민이 들더라. 이런 고민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같은 수업을 들은 동기밖에 없는 것 같더라.
M의 구구절절은 곧 내 이야기였다.
남은 하루는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몸뚱이를 일으켜 다시 노트북을 켰다. '어쩜 나와 이렇게나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상황에 처해 계신가요'라는 뉘앙스로 손가락에 불붙은 듯 키보드를 두드리며 답장을 쓰다가, 메일로는 서로의 속 사정을 가늠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휴대폰 번호를 함께 남겼다. 곧장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대화창에는 '맞아요', '제 말이요', '그니까요' 식의 말들이 오고 갔다. 처음이었다. 퇴사 후 번역가가 되겠다고 씩씩하게 나선 이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랑 이야기를 나누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메일에서 넘어온 카카오톡 창도 순식간에 답답해졌고, 나는 M에게 점심을 먹자고 권했다. 혹시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흔쾌히 날을 잡았고,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몇 주 뒤 M을 만났다. 화창한 날이었다.
실제로는 처음 대면한 사이였지만 어색할 틈이 없었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대화는 끊이질 않았고 M의 크고 작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새어 나온 것처럼 닮아있었다. 하다못해 일과 삶의 공간을 분리하고 싶어서 스터디 카페나 1인 사무실을 알아본 것도, 이 일을 준비하면서 잘 쓰던 맥북을 두고 윈도우용 노트북을 새로 장만한 것도 똑같았다.
무엇보다 둘 다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다행히 장장 4시간에 걸친 대화는 수렁에 빠지지는 않았다.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우린 망했어'라는 좌절감에 사로잡히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었다. 그런데 고해성사를 하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갑자기 한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
1928년생 현역 디자이너 노라노 여사는
"얼마만큼 노력해야 적절한 겁니까?"라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할 때 능력과 체력의 한계에서 10퍼센트 정도 여유를 둬야 해요. 젊은이들한테도 내가 당부를 해요. 100퍼센트 다 하려고 하지 말라고. 얼마 전에 만난 사람이 자기는 에너지의 120프로를 쓴다고 자랑을 해서 내가 "그거 위험하지 않아?" 걱정을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엊그저께 쓰러졌대. 여러분은 아직 인생을 반도 안 살았잖아. 그러니 내 말을 믿어요. 90년 산 내 지혜로 말하면 항상 10퍼센트는 남겨 둬야 해.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김지수
그렇다고 내가 일할 때 능력과 체력의 120퍼센트를 썼나, 하면 무조건 그런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절실한 마음은 절로 100퍼센트(어쩌면 그 이상)만큼 품을 들이게 만든다. 그래서 한 작업이 끝나면 나는 그리고 M은 녹초가 되었다.
10퍼센트 정도의 여유가 얼마만큼의 틈인지는 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6개월 동안 몇 차례 검토서도 써보고 번역 작업도 해보고, 또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 '거울 치료'를 하고 나니 이제 어깨에 힘은 좀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가 너무 아프다. 조금은 힘을 빼도, 아니 힘을 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떠오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나도 M도 그저 잘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