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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경 Dec 11. 2021

조각난 바다를 보러 가세요

강원도 고성의 태시트(TACIT)

강원도 고성에는 태시트(tacit)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카페가 위치한 청간해변은 관광지라기 보단 삶의 터전에 가까워 보이는 동네였다. 내가 그곳을 찾아간 건 목요일이었고 비가 왔으며 종일 흐렸지만, 그렇다해도 무척이나 한적한 편이었다. 그런 고즈넉한 곳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건 생긴 지 1년이 조금 넘은, #고성가볼만한곳 #고성핫플로 설명 가능한 태시트 때문이었다.


청간해변을 끼고 청간정길을 따라가다 보면 몇몇 주택과 한산해 보이는 횟집을 지나는데, 그러다 불쑥 하얀 벽이 나타난다. 그곳이 처음이라면 내비게이션의 다정한 안내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건물을 지나칠 수 있는데, 그래도 괜찮다. 곧이어 조용한 동네에서 부산스럽게 인증샷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될 것이고, 금방 '아, 여기구나!' 하며 카페를 발견할 것이다.


태시트 앞 청간해변


태시트는 하얀 담을 두르고 있었다. 높지는 않았지만 동네의 흔한 '담벼락'처럼 보이지 않아 주변 건물과 이질적인 경계를 만들었다. 해변을 마주보고 있는 담과 담 사이 틈이 그곳을 드나드는 입구였고, 그 한쪽 담엔 TACIT라는 검정색 로고가 군더더기 없이 붙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담을 따라 콘크리트 길이 이어지는데, 그 경계의 가운데 통유리로 된 하얀 건물이 자리했다. 마치 바닷가 마을의 하얀 온실처럼.


손님이 거의 없었다. 아무렴 비오는 목요일이니까. 여행을 온듯한 20대 초반의 남자 무리와 어린 아이가 있는 가족이 전부였다. 두 팀 모두 비를 피할 수 있는 바깥 좌석에 앉아있어 매장 안에 손님은 없었고, 엄마와 나는 안에 머물기로 했다. '온실' 속은 성수동이나 옥수동, 아니 굳이 그런 곳이 아니더라도 새로 생긴 카페를 가봤다면 새로울 것 없는 공간이었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통창, 하얀 시멘트 벽, 무심하게 살아 있는 무채색의 화분들, 찬기가 주저없이 와 닿는 대리석 좌석, 고사양의 스피커. 말 그대로 요즘의 힙. 늘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엄마는 평소와 달리 단 게 땡긴다며 라떼를 주문했고, 아빠한테 보낼거라며 이곳 저곳 사진을 찍기도 했다. 엄마는 종종 '힙' 앞에서 조금 움츠러 들며, "여기서 엄마가 나이 제일 많은 것 같아." 라는 말을 꼭 덧붙히곤 했는데 다행히 엄마는 이 곳 청간의 힙은 마음에 들었나보다.


엄마도 사진을 찍게 만드는 힙


가만히 앉아 창 너머를 내다보니 문득 궁금했다. 해변 근처 카페라 하면 수평선을 담은 파노라마를 연출하고야 마는데, 태시트는 우리가 걸어 들어 온 담과 담 사이, 그 틈만큼의 바다가 전부였다. 굳이 왜 바다를 조각내어 보여주려는 걸까 싶었지만, 신기한 건 그만큼의 바다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조각은 전체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가로로 끝없이 뻗어 나가는 수평선을. 게다가 보는 높이에 따라 두 개의 담과 수평선은 하나의 선으로 그려내며 그 틈을 바다로 채워냈다. 나는 이 모든 게 계획된 공간 안에 있는걸까? 콘크리트 담 안에 있는 우리는 '언젠가 이야기해야지' 싶은 것들을 신나게 쏟아 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말없이 같은 크기의 바다를 바라봤다.



나중에 알고보니 tacit는 '암묵적인', '무언의', '말로 나타내지 않은' 의미를 가진 형용사였다.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We can know more than we can tell' 라는 슬로건을 내거는 하나의 브랜드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 글을 남기기 위해 조금 더 찾아보니) 사람들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로, 헝가리 출신 영국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가 언급한 개념이었다. 그에 따르면 세상의 지식은 겉으로 드러나는 명시지와 타인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암묵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암묵지는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식이라, 머리에 기억되는 명시지와 달리 가슴, 정신, 영혼에 기억된다는 것이다. 이런 명시지를 'tacit knowledge'라고 일컫고 있었다. 어쩌면 청간해변에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고 그 곳에서 경험한, 어느 작은 마을의 고요가 더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오래 기억되길 바랐던 건 아닐까. 그랬다면 여행 중 잠시 머물렀던 공간을 구태여 글로 기록하고야 마는 나에겐 성공적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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