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거창하게, <프롤로그>
2009년도 수학능력시험에서 나는 평균 3등급을 받았다.
언어, 수리, 외국어, 사회탐구 중 두 과목만 2등급을 받으면 수시로 응시한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중 언어와 외국어에서 2등급을 예상했으나, 언어 영역에서 '1점'이 모자란 87점으로 3등급을 받았다. 결국 대기 번호 8번을 받고 정시로 인서울 대학에 겨우 입학을 했다.
재수할 자신이 없어 들어간 학교였고 점수에 맞춰 불어불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사실 불문과의 많은 학생들이 그랬다). 첫 학기 실컷 놀고 나니 뒤에서 5등이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받고 나서야 정신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다. 프랑스로 교환학생도 다녀왔지만, 학교와 동네 모두 한국인이라곤 나 하나뿐인 곳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돌아올 날을 매일 손꼽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데면데면한 학과 활동을 했고, 동아리도 대외 활동도 어느 하나 관심이 없었다. 나는 잘 노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일찍 알았다면 잘 노는 사람처럼 굴지 못해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무엇을 할지 늘 고민했지만, 어떤 결정으로 기울든 나는 잘도 도망치며 다녔다. 아주 오랫동안 라디오 PD가 되길 꿈꿔왔지만, 방송사 언론고시도 학력에 대한 장벽도 두려워 용기가 나지 않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전공을 살려 번역 일도 기웃거렸지만, 통번역 대학원으로의 진학 혹은 유학이라는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자니 그럴만한 확신이 없었다. 포기라는 것도 처음에만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워진다. 더 이상 방황이 싫다는 이유로 평범한 회사원이 되기로 했다.
반짝 유행했던 '인포그래픽'을 만드는, 사장까지 여섯 명이 전부인 디자인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영한 번역을 하는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다가 디자이너 밖에 없는 회사에 기획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삶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는 '어쩌다' 광고 AE가 되었고, 한 번의 이직을 거쳐 디지털 광고 대행사에서 6년 가까이 경력을 쌓다가 올해 8월 대책 없이 퇴사를 했다. 내가 어쩐지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 꽤 오랫동안 나를 뒤덮었는데, 그 생각이 너무 강력해져서 어떠한 '정신승리'도 더 이상 소용없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적당'과 '대충' 그 사이 어딘가에서 평생 애매한 인간으로 살고 있는 듯했다. 스스로 성실함으로 둔갑한 채 노력하는 시늉을 보였을 뿐 입시도, 청춘도, 꿈도, 일도, 나는 어느 하나 제대로 다이브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얕게 고민했고, 쉽게 도망쳤다. 3등급은 수능 성적이 아닌, 내 인생의 성적이자 가치로 느껴지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냉장고처럼 '에너지 소비효율 3등급' 스티커가 붙여진 인간인 채로 삶을 비관하며 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난 10년 간 애매하게 살아온 인생을 과대포장할 생각은 없다. 나를 더 사랑해보고 싶었다. 12년 전 수능 3등급은 빛나지 않은 점수일지 몰라도, 지금 인생이 여전히 3등급일지라도, 꽤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최근 들어 조금씩 스며들었다.
상위 23%에 해당되는 3등급. 학업 성적이 그랬듯 여전히 나는 특출 나게 잘하는 건 없다. 그렇지만 다행히 못 하는 것도 딱히 없다. 운동도, 요리도, 탐구도, 일도 제법 할 줄 안다. 두루두루 다양한 재능이 있다.
그래서 지금보다 할 줄 아는 게 얼마나 많은지, 또 얼마나 노력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보며 나에게 솔직해져 보려 한다. 회사와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하나 남겨둔 채, 지금이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이것 저것 하고 싶은 것 하면서.
그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 마침내 지금껏 살아온 삶을, 살아갈 삶에 큰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라며. 그리고 3등급 인생도 잘 살 수 있다고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길 바라며.
.photo by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