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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Jun 03. 2019

강화길의 <호수-다른 사람>을 읽고

진영의 이십 년 지기 친구인 민영이 그들이 사는 동네의 호숫가에서 쓰러진 상태로 발견된다. 민영은 의식불명 상태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녀의 남자친구인 이한은 진영에게 사건 현장인 호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며 같이 가보자는 제안을 한다. 진영은 그 호숫가에서 전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당한 기억이 있지만, 이한의 제안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그와 동행한다. 이한과 함께하는 길은 진영에게는 묘하게 불편하고 위협적이다. 호수에 도착한 이한은 물속으로 들어가 그가 찾던 물건을 발견하고, 진영에게 꺼내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 망설이던 진영은 그를 돕기 위해 물 안으로 걸어간다. 


사건의 배경인 호수는 여성에게 폭력이 가해지는 장소이다. 진영의 어린 시절 남편에게 학대를 당하던 미자네가 폭력에서 도피하는 곳이지만 거기에서도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희롱을 당한다. 진영이 전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당한 장소이며, 민영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곳이다. 이한은 그 호숫가를 폭력이 발생한 특별한 장소라고 여기지만, 진영은 동의하지 않는다. 소설은 이들이 특별히 불운해서 생긴 사건이 아닌,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위험이라고 말한다. 소설에서 좋지 않은 작명법으로 알려진 진영과 민영이라는 흔하고 등장인물끼리 서로 비슷한 이름을 사용한 점도 이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로 읽혀지길 바란 작가의 의도처럼 보인다. 


진영과 민영의 이야기를 통해 일상에서 여성이 겪는 두려움과 폭력을 보여준다. 단둘이 탄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남성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에서 여성은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남성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따뜻한 표정을 유지한다. 반면에 남성은 자신의 행동이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여자를 뒤쫓아가지 않은 자신을 신사적이라고 착각한다.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여성과 남성 간의 입장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영이 호숫가의 사고 전에 겪은 버스에서의 사건은 폭력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현실이다. 그녀들이 버스에서 욕설을 하며 소란을 일으킨 남자 승객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다음 정류장에 하차하는 일밖에 없다. 버스 기사는 흘끗 룸미러를 쳐다볼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진영이 어린 시절 자신과 민영을 향해 ‘너도 세컨드지’라고 놀리던 남자아이들 앞에서 선택할 수 있던 행동은 울고 있던 민영의 어깨를 감싼 손을 놓아버리는 것뿐이었다. 이한이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유독 ‘모르겠다, 괜찮다’는 말을 주로 사용하는 진영과 민영의 태도도 그녀들에게 노출된 폭력에 적응한 무력감의 표현처럼 보인다. 


전 남친에게 폭력을 겪은 이후로 진영은 주머니 속에 딱딱한 핀셋을 넣고 다니며 불안할 때마다 쥐는 버릇이 생겼다. 이는 남근, 남성의 폭력에 스스로 접촉하며 마치 예방주사를 놓는 듯한 행위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자신을 가해했던 남성보다 더 강한 것을 소유함으로써 안정을 찾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폭력을 경험한 여성의 트라우마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폭력에 대해 방어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성의 태도를 설명한다. 


피해자인 여성을 대하는 사회의 시선도 현실적이다. 엄연한 폭력을 ‘실수’나 ‘장난’, ‘오해’라고 말하는 남성 인물을 통해 가해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인 여성에게 조심했어야 했다고, 그러길래 왜 호수에 갔느냐면서 탓하는 사람들이나, 진정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은 무시되고 성폭행 사건의 자극적인 내용에만 관심이 있는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머리가 다 빠진 미자네를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진영과 민영도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매력적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보이던 이한은 순식간에 폭력의 주체로 돌변한다. 결국 미자네와 진영, 민영은 다른 사람이 아니며, 그녀들을 희롱하던 어린아이와 진영의 전 남자친구, 이한도 마찬가지다. 잔인한 폭력이 발생한 호수가 또한 특별한 비극의 무대가 아닌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민영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한 ‘호수에 두고 온 것’을 찾는 것은 결국 이 소설을 읽는 우리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의 진영의 ‘해야 할 일을 했다’ 라는 문장이 여러 의미로 해석된다.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이한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반대로 물속에서 발견한 딱딱한 물건으로 이한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라면 물속에 있던 딱딱하고 뾰족한, 길고도 얇고 날카로운 물건은 이한의 성기이자 남성으로부터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형태의 폭력일 것이며, 후자의 경우라면 여성이 자신을 향한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사용될 무기일 것이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게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싶다.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성의 현실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주는 것. 과연 우리는 소설 속의 그들과 진정 다른 사람이 맞는가 하는 의문을 남기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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