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는 한 달 전 출판사에 입사한 신입 사원이다. 회사에서는 수습 기간을 거친 후 영주와 그녀의 동기 해란 둘 중에 한 명만 채용할 계획이다. 회사에는 직급이 없고 오직 교정 일만 보는 조중균이라는 인물이 있다. 직원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안되고 특이한 고집이 있어 다들 그를 유령취급 한다. 입사 5주 만에 처음으로 영주와 해란에게 업무가 주어지고 그녀들은 조중균과 함께 일하며 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조중균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고지식한 사람이다. 그는 대학 시절 이름만 써내면 통과하는 시험에서, 아무것도 쓰지 않고 학점을 얻어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으로 이름을 적지 않고 굳이 다른 문장을 써내 유급을 당한다. 또한, 데모를 하다 경찰에게 붙들려가 조사를 받고 풀려나면서 경찰이 목욕값이나 하라고 준 오천 원을 모욕적이라고 생각해 몇십 년이 지나서도 갚으려고 하는 인물이다. 양심적인 그의 태도는 예전에는 가치 있다고 추앙받을만한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조중균이 틈나는 대로 쓰는 시의 제목인 ‘지나간 세계’처럼 그는 지난 시대의 가치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조중균이 외톨이가 되는 계기는 회사가 제공하는 점심을 먹지 않고 식대를 받아낸 일이다. 사실 연봉에 포함된 비용으로 운영되는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면 그 금액은 돌려받아야 하는 게 맞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위의 시선과 자신의 평판을 걱정해서 의견을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조중균은 그런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이면 굴욕을 견디면서도 해내는 사람이다.
그는 작고 느리게나마 사회를 고쳐나간다. 남들이 먹지 않는 상한 모시떡을 모두 먹고, 마감이 임박한 교정 작업도 원칙대로 처리하느라 기한을 한 달이나 넘긴다. 결국 그로 인해 배앓이를 하고, 근무태만으로 회사를 잘리게 된다. 불이익을 받으면서까지도 자신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방법으로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그가 답답하면서도 신성해 보인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조중균으로 인해 영주도 변한다. 늘 ‘씨’ 자를 붙여 부르며 거리를 두던 동기 해란에게 관심을 갖고, 상사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직원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그녀가 청춘들의 고된 삶을 무시하는 부장에게 주먹을 보여주며 하지 못했던 말을 한다. 조중균의 세계가 그녀에게 영향을 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조중균의 시가 데모의 불쏘시개가 되었던 것처럼 그녀도 조중균을 이용하여 성장한 듯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세계 속에서만큼은 더없이 자유로웠던 조중균. 그는 양심, 원칙, 성실과 같은 지나간 시대의 가치를 상징한다. 분명 옳고 바른 것이지만, 낡고 오래된 정의들이다. 우리는 그런 가치들을 고루하고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무시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기도 한다. 자신이 썼지만, 자신의 시는 아니라고 말하는 ‘지나간 세계’라는 시는 곧 지나간 가치란 우리가 만들지는 않았어도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조중균이 있을 때는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던 직원들이, 그가 회사를 떠나고 난 뒤에야 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지난 가치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바로 지금이 조중균의 세계를 말해야 할 때가 아닐까.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융통성과 가치를 전환하는 게 중요해진 사회에서 때론 부적응자 같은 그의 가치가 묵직하게 남는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올곧고 바른 고지식함을 꺼내보게 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