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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May 27. 2019

이기호의 <한정희와 나>를 읽고

주인공과 아내, 어린아이 둘이 사는 집에 한정희라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들어온다. 주인공의 아내는 어려서 아버지가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 일로 어머니의 친구 집에 몇 년간 얹혀산 일이 있다. 정희는 그 집의 손녀인데, 마침 정희의 아버지가 징역을 살게 되어 정희를 돌볼 사람이 없어 주인공 부부가 맡게 된 것이다. 정희는 새로운 가족과 학교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지만, 어느 날 주인공은 정희가 친구를 따돌리고 괴롭힌 일로 학폭위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한정희’와 ‘나’ 사이는 이해될 만한 것들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결국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 정희가 주인공의 집에 들어온 것과 그의 아내가 어머니의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된 상황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은 그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점이다. 주인공은 정희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뉴발란스’ 운동화를 사주고, ‘스타벅스’에서 녹차라떼를 마시고, 정희는 주인공에게 ‘방탄소년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정희가 괴롭힌 친구에게 보낸 문자에 담겨있는 ‘찐찌버거’. ‘안여돼’ 같은 줄임말과, 친구를 괴롭힌 것이 따돌림을 당했을 때 반응을 보는 일종의 ‘팸놀이’라는 정희의 말은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가끔은 실제로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한 꺼풀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다고 말하는 듯 하다.


친구를 괴롭히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정희는 사과문을 쓰는 것으로 학폭위가 해결되자 작가인 주인공에게 대신 사과문을 써달라고 말한다. 이에 주인공은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염치없는 나쁜 아이라는 말을 하고 정희는 그의 집을 떠난다. 소설의 주인공은 마치 이기호 작가 자신인 듯 보인다. 작가라는 직업도 같고, 학교에서 글을 가르치는 점도 비슷하다. 주인공은 고통받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쓰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바라보며 쓰고 있다는 회의감을 느끼고, 죄와 사람을 분리해서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한정희라는 아이가 이해의 대상으로 나타나지만, 주인공은 끝내 그녀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는 작가가 글을 쓰며 느끼는 고민과 어려움을 그대로 담아낸 게 아닌가 싶다.


정희가 얼마나 못된 아이인지, 이해받을 가치가 있는 인물인가보다는, 한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처럼 보였다. 작가인 자신도 여전히 타인과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소설은 계속 쓰여져야 한다는 것, 글 쓰는 사람의 숙명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이해라는 게 무용하게 느껴졌다. “남은 이해하는 게 아니야. 그냥 저런 사람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거야”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도 했다. 관계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설령 그게 악인, 가해자라고 하더라도. 글 쓰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닐까 싶다.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그 시도만이라도 얼만큼의 가치는 있을 것이다. 글의, 소설의 가치가 바로 그런 거라고 이기호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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