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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Jun 12. 2019

황유미의 <피구왕 서영>을 읽고

‘피구’ 하면 연상되는 장면은 당연하게도 삐죽 솟은 붉은 머리를 하고 불꽃 슛을 날리는 피구왕 통키였지만, 몇 년 전부터는 영화 <우리들>이 되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는 피구 경기를 앞두고 팀원을 뽑는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이 선택되기를 바라지만, 끝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는 상황을 감내하는 소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보여준다. 이는 보는 이의 마음을 무너져내리게 하는 동시에 피구가 얼마나 잔인한 스포츠인지 알게 한다. 심지어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는 초등학교 4학년 서영은 전학 간 학교에서 자신과 잘 어울리는 짝꿍 윤정을 만난다. 하지만 그녀는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우두머리 그룹의 아이들은 서영에게 윤정과 놀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 무리의 중심에는 공부 잘하고 집도 부유한 현지가 있다. 서영은 방과 후에 하게 된 피구경기에서 운 좋게 활약을 하게되고, 현지는 그런 서영을 자신의 무리에 끼워준다. 서영은 윤정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현지의 무리를 택한다. 현지와 윤정을 사이에 둔 서영의 불편한 학교생활은 계속되고, 그녀의 앞에는 체육대회의 피구경기가 기다리고 있다.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인 어린아이들을 포식자와 피식자로 구분하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약육강식으로 묘사한 점이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 또래 집단이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 시절을 경험했다. 소설은 사건의 순간마다 독자를 이야기 안으로 데려다놓고, 만약 내가 서영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느껴진 가장 큰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그 이유는 서영의 행동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약 나였어도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외면하고 싶은 내 안의 비겁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마친 후 서영은 윤정과 둘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둘 만의 피구 연습을 하지만, 교실에서는 현지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윤정과 데면데면하게 지낸다. 윤정이 현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침묵하는 서영이 답답하고 위선적으로 보이지만,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소외되는 게 두려워 서영처럼 사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현지가 갖고 있는 힘에 편입되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윤정처럼 살고 싶지만 그런 용기를 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자신은 양심 있는 사람이라고 자위하며 힘 있고 못된 현지를 속으로 비난하는 편을 택한다. 실제로는 현지의 무리에 끼기 위해 아등바등하면서도. 읽다 보면 이 소설이 어린아이가 마주하는 고민을 통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비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영이 현지와 하는 피구는 마치 남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배틀로얄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피구에서 ‘죽인다’는 표현인 남에게 공을 맞혀 코트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내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단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반대로 마음이 맞는 윤정과의 피구는 피구를 처음 고안해낸 자가 의도했을 이상적인 스포츠의 모습이다. 즐겁게 경기하며 왕따가 될지, 승리에 집착하며 악착같이 상대에게 공을 던져서 힘 있는 무리에 인정받을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결국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듯해 씁쓸해진다. 


책을 절반 넘게 읽었을 때 서영이 현지의 얼굴을 향해 세차게 피구 공을 날리는 장면이 결말에 그려지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소설 속에도 현실에도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소설에서의 피구 경기는 우리의 삶이며, 코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무대이다. 만약 내가 글의 후반부를 썼다면 서영이 피구 코트 밖으로 나가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했을지 모른다. 혼자 버티고 서있기 쉽지 않은 피구 코트를 도망치는 것만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서영이 더는 현지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렇다고 윤정을 애타게 바라보지도 않으며 눈앞에 있는 피구 공에만 집중해 경기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 앞에 놓인 것에 집중하며 의연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해주는 현지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조금은 판타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구 경기에 참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눈앞의 적을 해치운다는 생각으로 상대편을 향해 독하게 공을 던지거나,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을 이리저리 피하며 끝까지 살아남을 수도, 금방 공에 맞아 코트 밖으로 나가 경기를 관망하는 방법도 있다. 그 어떤 것이 되었던 게임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때 가장 필요한 가치는 역시 용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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