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운 Nov 04. 2020

늦은 축하

책이 나온 지 여덟 달이나 됐고, 그 얘기를 어제서야 주위 사람들에게 했다. 누나와 고향 친구들에겐 말도 없이 택배를 보냈고, 대학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체 카톡방엔 교보문고 구매 링크를 남겼다. 1년쯤 전에 친구들에게 직장 이야기를 써서 인터넷에 올리다 운 좋게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고 말한 게 전부였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책이 언제 나오냐고도 묻지 않았다. 아마 친구들은 출간이 취소됐다고 생각했거나, 워낙 실없는 소리를 잘하는 내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주위의 누구에게도, 가족과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까지 콜센터에 다닌다고 말하지 못했다. 직업에 대한 귀천을 먼저 보는 속물됨과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는 낮은 자존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거짓말은 하기 싫어서 무슨 일을 하냐는 물음에 공연 티켓을 판매하는 기업인 OOOO의 용역업체에서 일한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직장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자리를 마치고 나면  콜센터 다니는 게 무슨 죄라도 되는 듯 여기는 못난 자격지심을 미워했고, 그렇다고 떳떳이 밝힐 용기도 없는 나를 혐오했다.

함께 일한 동료 중에도 콜센터 상담원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책이 나오고 그들에게 가장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책이 출간되면 ‘그동안 나 이렇게 고생했습니다’ 하며 주위에 고백하고, 자랑하려 했는데 잘 안됐다. 이때는 부끄러움보다 5년 동안이나 직업을 숨겼다는 것에 대해 주위에서 나를 징그럽게 여기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또, 진상을 만나 모욕을 당하고 아파한 이야기를 제발 알아달라고 브런치며 블로그에다 올렸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만은 수모의 기록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책을 읽은 독자들이 나를 비웃거나 한심하게 여기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도, 내 주위 사람들의 감상은 걱정됐다. 혹시라도 친구들이 나를 동정할까 봐. 여러 번 고민했지만, 책 출간은 나만 아는 비밀 같은 걸로 묻어두려고 했다.


그랬던 마음을 바꾸게 된 건 오랜만의 고향 친구들과의 만남을 앞두고 서였다. 몇 년 전부터 좀처럼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나 때문에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의무적으로 모이기로 약속했다. 펜션을 잡고 술과 음식을 잔뜩 사서 먹고 노는 게 전부지만 우리 사이에선 중요한 행사였다. 원래는 5월에 모였어야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11월 중순으로 미뤄졌다. 책을 출간하고 나서 고향 친구들과는 처음 만나게 될 자리였다.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을 마치고 친구들과 마주할 저녁을 상상하는데, 이제 나는 좀 편해지고 싶어 졌다.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숨기는 사실이 있다는 것은 매번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번만큼은 그냥 다 털어놓고 편하게 먹고 놀고 싶었다. 출간 당시에 출판사에서 저자용으로 준 책이 열 권 그대로 책장 구석에 묵어가고 있었다. 책을 꺼내 먼지를 털고 표지를 열어 난생처음으로 사인을 하고 택배를 보냈다.


가장 먼저 책을 받은 친구는 내가 너무 자랑스럽다고 했고, 누나는 글 쓰는 재주도 있냐며 놀라했다. 제주도의 친구는 ‘야 이 X놈아 책 왔져’라고 욕지거리를 했다. 나와는 달리 다들 대기업, 공무원, 공기업에 다니며 결혼해서 자식 낳고 안정되게 잘 사는 대학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내기 전에는 한참을 고민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고 얼마 되지 않아 친구들의 카톡이 왔다. 나는 결단코 멋진 사람이 아니지만, 멋지다는 말을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날이었다. 예전부터 나는 멋져 보이려고 무던히 애를 썼고, 언제부턴 가는 멋지게 보이기보다는 못나 보이지 않기 위해 버둥거렸다. 콜센터에 다닌다고 솔직히 말하지 않은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였다. 그런데 가장 숨기고 싶던 이야기 덕분에 책을 쓰고, 그렇게나 바라던 멋지다는 말을 듣게 되니 내가 그렇게 숨기고 싶었던 건 뭐였을까 싶어 졌다.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은 아니라도 자기 자리에서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을 분명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나는 그러질 못했다. 5년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까


콜센터에서 일한 이야기로 책을 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친구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했었다. ‘너 콜센터에 다녔냐’고 물으면 ‘나 그동안 엄청 고생했어 ㅠㅠ’라고 답할 작정이었다. ‘왜 숨겼냐’라고 섭섭해하거나 따져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열 명이 넘는 친구들 중 누구도 그런 물음을 묻지 않았다. 내가 콜센터에 다닌 걸 예전부터 아주 잘 알고 있던 것처럼 그냥 축하한다고, 멋지다고, 자랑스럽다고 했을 뿐이다. 그동안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내 마음을 짐작해서 그런 걸까 싶었지만 그런 배려 따위는 하지 않는 아이들까지 그랬다. 만나자고 하면 자꾸 피하고, 직장 이야기는 절대 안 하는 내가 콜센터보다 더 험한 일을 하고 있거나 백수로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님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크게 관심이 없었던 걸까. 어쩌면 우리 사이에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을지도. 


내 딴에는 큰 맘먹고 5년간 꽁꽁 숨겨온 비밀을 털어놓은 후 아주 속 시원해질 생각이었는데 대수롭지 않아 하는 친구들 반응 때문에 좀 뻘쭘해졌다. 그리고 고마웠다. 호들갑 떨지 않아 줘서. 친구들이 보낸 축하 카톡을 모두 저장해뒀다. 생일 축하가 아닌 축하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나는 살아가는 동안 여전히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게 생기겠지만 그때마다 오늘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을 것이다. 대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지만,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서로의 삶이 달라지면서 조금 멀어졌다고 생각한 친구가 있다. 책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직접 전하지 못했는데 다른 친구에게 듣고선 바로 전자책으로 주문해서 읽고 축하한다고 연락을 해왔다. 너무 우울한 내용이라 친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말에 이런 답을 해준다.


작가의 이전글 창비교육의 신간 『땀 흘리는 글』에 글이 실렸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