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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Dec 19. 2020

작고 낡은 집에서 살아가기

연락이 뜸한 친구들과 오랜만에 카톡을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너 아직 거기 살아?’ 나는 아직 여기에 살고 있다. 샤** 오피스텔. 지어질 당시에는 이국적이고 세련된 이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더없이 촌스럽게 느껴진다. 무슨 뜻인가 하고 찾아보니 프랑스어로 ‘매력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매력적이기에는 너무 좁은 곳. 침대와 싱크대 사이의 공간에 빨랫대를 세우면 몸을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공간밖에 남지 않는 곳. 매력이라는 말로 수식할 수 있는 것에는 최소한의 규모가 필요한 걸까.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아도 살 수는 있다. 그러니까 내가 7년이 넘도록 살고 있겠지. ‘내가 먹는 것이 나’, ‘내가 사는 곳이 나’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작고 좁은 집에 딱 맞춰지려는지 날마다 살찌고 있고, 초라한 이 집과 점점 닮아간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몸에 문제가 생기는 나처럼 집도 탈이 난다. 입주하기 전부터 이미 오래된 건물이었던 터라 몇 달 지나지 않아 현관 센서등이 고장 났다. 전등을 열어보고 맞는 사이즈의 백열전구를 사서 갈아 끼워 봤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워낙 좁은 집이라 현관 센서등이 고장 나도 딱히 불편한 게 없기에 그대로 방치해뒀다.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모르기도 했고. 다행히 그 후 몇 년간은 세탁기가 고장 나서 교체한 것 외에 별 일은 없었다. 그러다 내 상태가 가장 좋지 못했던 작년 가을,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좁은 집에 비해 너무 컸던 빌트인 냉장고는 그 날 이후 다시는 냉기를 뿜지 못했다. 요리를 거의 해 먹지 않고 배달음식과 인스턴트 음식으로 연명하던 터라 냉장고에는 뭐가 없었다. 물, 반쯤 먹은 시리얼, 멸균우유, 유통기한 지난 머스터드소스 같은 것들 뿐.


당시 나는 몹시도 무기력해 냉장고를 고치거나 교체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물은 미지근한 채로 마셨고, 우유는 거의 먹지 않았다. 먹다 남은 배달음식은 다행히 작동하는 냉동실에 넣어두고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다시 가을이 돌아왔다. 고장 난 냉장고를 1년이나 끼고도 어찌어찌 살아지기는 한다. 시원한 물이 먹고 싶을 때는 냉동실의 얼음을 꺼내 물에 넣어 마시면서, 때론 미지근한 우유에 시리얼을 타 먹으면서. 나의 무기력 때문에 냉장고를 고치지 못했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고장 난 냉장고가 나의 무기력에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냉동실까지 고장 났다면 아마도 바로 냉장고를 교체했을 거다. 때론 적당히 고장 나는 게 완전히 망가지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을까


문 밖의 온도와 똑같은 냉장고에 익숙해지고 센서등 같은 건 기억에서 잊혀졌을 때,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영상 하나를 보게 됐다. 고장 난 센서등을 교체하는 7분짜리 영상이었다. 직접 센서등을 갈면서 설명하는 영상 속 주인공을 가만히 보는데, 예상외로 너무 쉬워 보였다. 곧바로 쿠팡에서 리뷰가 가장 많은 상품을 주문했고, 다음 날 로켓처럼 LED 센서등이 도착했다. 두꺼비집을 내리고 의자에 올라가 센서등을 돌려 여는데 유튜브에서 본 모양 그대로였다. 고장 난 등을 제거하고, 천장에서 내려온 전선과 센서등의 전선을 연결한 뒤 천장에 등을 고정시키면 끝이었다. 이렇게 쉽다고? 반신반의하며 두꺼비집을 올리는 순간, 센서등에 불이 들어왔다. 예전에는 백열전구의 노란빛이었는데, 지금은 LED의 환한 흰 빛이 신발장 구석구석을 밝혔다. 여기가 이렇게나 더러웠구나. 언제부터 쌓였는지도 모를 바닥의 먼지들을 깨끗이 닦아냈다.


이런 것도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민망하지만 어쨌든 나는 해냈다. 티끌만 한 성취에 자신감을 얻어 내친김에 냉장고 교체에 돌입했다. 집주인에게 냉장고가 고장 났다고 연락하니 알아서 교체하고 비용을 청구하라고 했다. 빌트인 냉장고라 어떻게 교체해야 하는지 몰라 오피스텔 1층의 부동산에 물어봐서 크기에 맞는 모델을 알아냈다. 다만, 설치 업체는 냉장고와 연결된 문짝(내가 매일 열고 닫는 게 냉장고 문인 줄로 알았는데, 그건 냉장고 문과 단단히 결속된 빌트인 가구 문짝이었다)을 해체해주지는 않으니, 관리사무소에 음료수라도 들고 찾아가 사정하면 도와줄 거라고 했다.  여기서 조금 주춤했다. 음료수까지 사들고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싫었고, 무엇보다 관리사무소 직원분의 일이 아닌데 부탁을 해서 처리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며 고장 난 냉장고를 이리저리 살피는데 7년을 살면서도 보지 못했던 문짝의 모서리마다 달린 힌지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샀는지도 모를 싸구려 드라이버 하나로 나는 다시 해냈다. 냉장고와 문짝을 합체시키던 힌지를 모두 해체하고 문짝을 들어냈다.(7년 만에 처음으로 제 모습을 보인 냉장고의 실제 문짝은 곰팡이로 새까맣게 뒤덮여 있어 나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교체하기 쉽게 빌트인 장에서 냉장고를 꺼내 옆으로 치워놓고(나는 운동신경은 별로 없지만, 힘은 아주 세다) 문짝은 깨끗이 닦아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밖에 내놓았다. 비록 장판 두 군데가 찍혔지만 괜찮았다. 다음 날, 설치기사 분들이 와서 새 냉장고를 채워 넣고, 고장 난 냉장고를 가져갔다. 새 냉장고는 아주 잘 작동됐고, 멸균우유와 곤약젤리를 채워 넣고 유통기한이 넉넉한 머스터드소스를 샀다. 1년 만에 집에서 시원한 물을 맛보게 됐다는 기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싱크대 위의 형광등이 나갔다. 갖고 있던 새 형광등으로 교체했는데, 계속 깜빡거리는 걸 보니 안정기가 수명을 다한 듯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어두컴컴한 채로 설거지를 하며 살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다시 유튜브와 쿠팡의 도움으로 고장 난 안정기마저 교체했다.

자신감을 얻어 끼긱대고 잘 돌아가지 않던 싱크대 수전까지 교체했다. 싱크대 밑이 좁아 무척 고생을 했지만.


어렵지 않은 일들을 어렵게 처리하고 나니, 정말로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다. 가령, 자가로 사는 집에서 고장 난 수도 배관을 고치거나, 주방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사람, 애를 둘, 셋 쯤 낳아 키우는 사람. 지난달 운전 중 갑자기 옆 차가 끼어들어 폐차를 시킬 만큼 큰 사고가 난 와중에도 보험 약관을 살피고 유튜브를 보며 공부해서 100대 0으로 합의를 해낸 친구가 진심으로 대단해 보였다. 나는 냉장고 하나 바꾸는 것도 이리 어려운데 애 키우면서 야무지게 사는 너를 보면 대단하다고 말하니 친구는 닥치면 다 하는 거라고 답했다. 친구의 말이 맞을 거다. 다만, 무언가에 닥쳐보는 것도 의지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동안 나는 닥치지 않기 위해서, 낯설고 불편한 상황에 놓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삶의 반경을 스스로 좁혀갔다. 친구와의 대화를 끝내고 이길보라 작가의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를 사고, 그날 저녁엔 매번 주문하던 익숙한 음식점이 아니라 새로 생겨 리뷰가 얼마 없는 백순대 집에서 배달을 시켰다. 책은 아직 못 읽었지만, 백순대는 성공이었다.

 

여전히 매력적이지 못한 공간이지만, 전보단 나아진 건 확실하다. 차가운 우유에 말아먹는 시리얼이 훨씬 맛있고, 좁아터진 집이라도 센서등이 있는 게 이른 아침 신발 찾기에 좋다. 센서등이 처음 고장 났던 7년 전에는 이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거라고, 곧 스쳐 지나갈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이 원룸을 벗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게 꼭 불행하거나 비참한 건 아니다. 요번처럼 고장 나면 고치고, 상처 나면 때우며 살면 된다. 넓고 안락한 나의 집을 꿈꾸면서. 작고 좁은 나의 왕국을 수리했으니, 이젠 나를 챙겨야 한다. 아말감이 떨어진 어금니를 때우러 가야 하고, 지방간 때문에 높아진 간수치 검사도 받아보려 한다. 며칠 전에는 오랫동안 지속된 무기력을 떨쳐보려 병원을 찾아 약을 탔다. 약을 먹은 지 얼마 안돼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에 세수를 하는데 갑자기 손에 힘이 들어가 전보다 세게 얼굴을 박박 문댔는데 혹시 이게 기력이 생기는 건가.


이 하찮고도 소중한 성취를 해낸 게 다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영상 때문일까. 그때 그 영상을 보지 않았다면, 아직도 난 불이 들어오지 않는 센서등과 고장 난 냉장고, 오랜 무기력과 함께하고 있으려나. 잘 모르겠다. 내 상태가 더 안 좋았더라면 그 영상을 보고도 별생각 없이 지나쳤을 수도 있고, 반대로 영상을 봤기 때문에 센서등 수리가 쉽다는 걸 알게 되어 의지가 생긴 걸 수도 있다.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내가 아는 건 유리창이든 냉장고든 일단 고장 나면 얼른 고쳐야 한다는 것, 고장은 전염된다는 것. 앞으로 닥쳐올 고장에 대비하기 위해 쓸만한 드라이버를 샀다.(전동드라이버를 사고 싶었지만 참았다) 화장실 전등의 불빛이 약하고 자꾸 깜박거리는 게 곧 고장 날 것 같지만 괜찮다. 나는 이제 안정기 교체하는 방법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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