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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Oct 01. 2024

7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적십자회비

 고위공직자가 되려면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나라를 이끌어가고 국민들에게도 모범이 되어야 할 고위공직자이기 때문에 인사청문회에서는 후보자의 공직 업무수행능력 뿐만 아니라 도덕성을 검증한다. 그런데 재미난 게 인사청문회 할 때마다 도덕성 부문에서 자주 거론되는 적십자 질문이 하나 있다는 거다. 바로 적십자회비 납부여부다. 납부하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데, 납부하지 않으면 국회의원들의 호된 지적과 함께 ’지난 0년간 적십자회비 납부실적 전무‘와 같은 기사가 매체에 기사화되면서 후보자들은 곤욕을 치른다. 2024년에도 예외는 없다.


 그렇다면 적십자회비는 왜 인사청문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출문제가 되었을까? 그만큼 적십자회비는 재난구호, 취약계층 지원, 안전지식 보급,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 사업 수행에 쓰이는 대표적인 재원이자,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국내에서 가장 광범위한 모금이기 때문이다.


1920년 상해 임시정부 시절 대한적십자회 간호원 양성 활동


 적십자회비의 역사는 적십자의 긴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시절 대한적십자회에서도 재정 기틀을 확립하여 독립군을 지원하고 간호사를 양성하기 위한 기금으로 적십자회비 모금을 하였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범 국민운동적인 적십자회비모금은 해방 이후 대한적십자사가 재조직되고 난 이후인 1949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6.25 전쟁 중 부산에서의 전재민 구호활동 (1953년)


 당시 명예총재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마다 적십자사에 있어서 전쟁 때는 부상을 당한 군인들과 그 가족을 도와주며 평시에는 수한(水旱)과 기타 모든 천재에 빠진 동포들을 구제하여 주며 국제법상으로는 리웃 나라에 재난이 있슬때에 서로 구휼하나니 세계인류가 서로 구제하는 단체로는 적십자사보다 더한 기관은 없을 것이다.’라고 시작하는 선포문을 발표하며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100만 명 적십자 회원모집에 십시일반 참여해 줄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그 결과 당초 목표 보다 15% 초과한 115만 5413명이 회원이 모집되고 1억 5428만 원이 거두어졌다.


1953년 미국적십자사 응급구호반 지원으로 만든 식사 안내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모금이 체계적으로 진행되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대신 외국적십자사의 원조를 받아 의료와 구호부문 사업을 상당히 진척하였고, 1954년 회비모금이 성공하게 되면서 사업역량을 다시 높일 수 있게 되었다.


6.25 전쟁 중 적십자 회비모금 홍보 포스터 (1952년)


단기 4288년 적십자회비 (1955년 적십자회비 영수증) / 출처 : 카페 <잔잔한 즐거움이 가득한 곳 -- 나만의 수집세계>


 그렇게 이어지던 적십자회비는 1974년부터 대통령 담화문에서 국무총리 담화문으로 바뀌어 진행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읍‧면‧동 행정기관 직원을 적십자회비 모금위원으로 위촉하여 그들이 현장에서 현금을 수납하고 직접 영수증을 교부해 주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2000년 이후부터는 세대주, 개인사업자, 법인, 단체 및 기타 희망자를 대상으로 금융기관 지로를 통한 자율납부제가 시행되었고, 세대를 구성하는 모든 가정에 지로용지를 보내드리게 되었다. 최근에는 그 대상범위를 조정해 납부이력이 있는 가정에 지로용지를 보내드리고 있다. 이처럼 적십자회비는 시대에 따라 모금방식이 조금씩 달라져 왔지만 70년 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역사 깊은 모금제도다.


1987년 적십자회비 국무총리 담화문


 매년 겨울이면 적십자회비 모금시즌이 돌아온다. 과거 적십자 지로용지 분류와 배부는 양이 많아 모든 직원이 달라붙어야 했다. 입사 첫해 겨울이던 2003년 12월, 나는 충북 제천시에 지로용지를 배부하러 가게 되었다. 청주에서 차로 두 시간 떨어진 제천시의 17개 읍면동을 업무시간 중에 모두 방문해서 적십자회비 지로용지를 전달하고 오는 일이었다. 동(면)사무소를 방문해서 지로용지를 전해 드리고 올해도 배부를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하는데, 그때만 해도 담당 공무원 분들이 “좋은 일 하시네요.”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음료를 한 잔씩 내어주시곤 했다. 어느 분은 믹스커피를 주시고, 어느 분은 박카스를 주시고, 어느 분은 티백 녹차를 주시고, 어느 분은 비타 500을 주셔서 주신 걸 예의상 다 받아먹었더니 10잔에 가까웠다.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에는 뱃속이 온갖 음료들로 믹스가 돼 속이 니글니글해서 저녁을 못 먹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뿌듯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나는 2005년부터 약 4년 반 정도 회비업무를 담당했었다. 연말이 다가오면 행정기관으로부터 받은 세대별 자료와 주민세 자료에서 제외대상을 추려 정리하고, 그 자료로 최종 지로용지를 업체에 맡겨 출력하고, 출력된 지로용지를 받아서 직원들과 각 시군 읍면동으로 배부하고, 읍면동 이‧통장님이 각 가정에 배부하는 절차를 진행하면, 용지를 받은 개인이나 단체는 참여했다. 지로용지 배부 외에도 본사에서는 명예총재인 대통령, 국회의장부터 특별회비를 받듯이, 지역에서는 도지사, 시장(군수), 지방의회와 연락해 특별회비 전달식 일정을 잡아서 순회하며 회장님과 성금을 받으러 다녔다. 기업체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보내지는 비료지원 출항 보고회 (1997년)


 그러나 모금은 순조롭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인도주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필요 목표금액이 있는데 자율모금으로 전환되고 나서부터 그 금액은 1차에 달성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2차 3차에 걸쳐서 납부 못한 사람들에게 참여를 간곡히 요청드리고자 재차 모금용지를 보내드리곤 했다. 통장님을 통해 배부가 어려운 아파트는 직원들과 사회복무요원이 함께 나가서 가가호호 우편함에 꽂아놓고 오기도 했다. 최근은 이런 절차가 우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배부 방식은 점차 축소되고 사라지고 있다.


 과거 적십자회비 하면 ‘십시일반’ 모금의 상징이었다. 여러 사람이 조금씩 힘을 합하면 한 사람을 돕기 쉽다는 의미의 십시일반. 독지가 한 사람의 막대한 성금보다는 같은 금액이지만 다수의 동참을 요청하는 모금이었고, 실제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에 적십자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거나 적십자가 하는 활동을 지켜보고 좋게 평가해서 참여하는 분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점이 좋았다. 지위고하 재산여부에 관계없이 마치 평등하게 참여하는 모금 같았다고나 할까. 어느덧 사회가 발전하면서 일률적인 기부보다는 자기 관심 분야의 기부로 옮겨가고, 자율적으로 납부가 자리 잡으면서 젊은 층의 적십자회비에 대한 참여가 줄어들어 그 부족분을 고액 후원에서 충당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정기적인 후원회원 모집이 나날이 커지고 있으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적십자회비 모금은 아직도 국민적인 모금이라 매년 겨울이면 지속되고 있다. 그렇게 모금된 금액으로 한 해 동안 재난 구호, 사회봉사, RCY, 안전교육, 의료사업,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 활동의 사업비와 운영비로 충당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국내에선 중부지방 폭우 피해, 봄철 산불, 8월 인천 지하주차장 화재 피해, 6월 화성 아리셀 화재, 1월 서천화재 피해 때도 적십자는 그 기금으로 현장에 발 빠르게 달려갔으며, 멀리 국외로는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 피해 구호,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구급차 40대 전달 등 그 역량을 다하고 있다. 집행에 있어서는 국정감사, 감사원 감사, 보건복지부 감사, 외부회계법인 감사 및 내부감사까지 여러 절차를 통해 사업의 투명성을 검증받고 있다. 그런 조직은 내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적십자밖에 없다. 단 이런 모금과 사업, 집행 과정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람들에게 우리의 활동이 가닿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 못내 아쉽다. 때로는 남들에게 관심 없는 일이라도 누군가는 꼭 해야 하고 틈을 메워야 하는 일도 있다.


폭설 구호활동


 모금의 방식은 시대에 따라 디지털화되는 등 계속 달라지고 발전해 나갈 것이다. 적십자회비 모금도 계속 다른 방식으로 변모할 것이다. 적십자회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적십자회비 지로용지는 겨울이면 여러분을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적십자는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너무나 당연해서 청문회에서 이 질문이 사라지는 그날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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