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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뒤낭, 그가 진 십자가

by 포데로샤


벽돌책은 통상 500페이지 이상의 두꺼운 책을 일컫는다. 지난 주말 몇 주간 매달렸던 한 권의 벽돌책을 끝냈다. 대한적십자사 인도법연구소가 지원하고, '자유롭고 공평하며 지배가 없는 퍼블리싱 컴퍼니'를 표방하며 인류 천재들의 지혜를 현대에 맞게 전하고 있는 이소노미아 출판사에서 발행한 <앙리뒤낭, 그가 진 십자가(코린 사포니에르 지음/이민주 옮김)>가 그 책이다.


이 책의 쪽수는 564쪽. 하지만 일반 시중의 벽돌책 보다도 이 책을 마지막까지 읽어내는 과정은 길고도 힘들었다. 출판사에서 글자 크기와 줄 간격을 최대한 줄여서 종이에 꽉꽉 눌러 담았기 때문이다. 일반 에세이나 벽돌책을 견주어도 이 책 분량은 1.5배를 곱한 900페이지 전후가 맞지 않았나 싶다. 내겐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방대한 책이었다.


적십자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나 일반인에게는 아직도 생소한 이름인 앙리뒤낭. 먼저 이 책의 주인공 앙리뒤낭을 살짝 소개하고 가야겠다.


스위스 사람인 앙리 뒤낭은 1859년 이탈리아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을 목격한 뒤 1962년 전쟁의 참상과 자신의 체험을 엮은 책 '솔페리노의 회상'을 출간하여 국제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그는 이 책에서 상병자를 돌보기 위해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구호단체를 평시에 각국 내에 조직할 것과 상병자와 그들을 돌보는 구호요원을 보호하고 이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국제조약 체결을 제안하며 각국 정부와 군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그의 열정으로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설립과 제네바협약 체결이라는 결실로 이어졌고, 그는 이러한 공로로 최초의 노벨 평화상을 프레데리크 파시와 공동 수상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의 생일인 5월 8일은 오늘날 세계 적십자의 날로 기념되고 있으며, 2023년 IFRC(국제적십자연맹 기준) 기준 적십자는 191개국 53만 1000명의 직원과 1억 560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활동하는 인도주의 국제 네트워크가 되었다.


솔페리노의 회상 초판본과 첫 페이지 (사진 출처 : 위키백과)


흔히 우리가 아는 앙리 뒤낭의 주된 이야기가 여기까지다. 이런 내용만으로 끝난다면 이 책의 가치가 뭐가 있겠나. 그런데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이런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적 결함과 갈등까지 삶을 입체적으로 깊이 있게 알 수 있도록 조명한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이상주의자이자 인도주의자이자 야심가로서 앙리뒤낭이 평생 보여주었던 열정도 담겼지만, 채무자로서 파산한 뒤 곤궁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모습, 사람들로부터 잊히지 않고 재기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요함, 방에 틀어박혀 외출도 삼가고 외부인도 만나지 않는 강박적인 면모 등 앙리뒤낭의 일거수일투족도 깊이 있게 보여준다.


인간은 완전무결하지 않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때로는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전체가 될 수는 없다. 앙리뒤낭은 신념 있는 사람이었고, 적십자를 세우고 확산시키는데 일생을 바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갔지만, 앙리뒤낭이 보여주었던 인류애와 구호와 봉사의 의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책을 읽는 동안 앙리뒤낭이 짊어진 십자가가 무엇이었는지를 잠시나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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