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되니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난다. 우리 곁을 떠나신 지도 어느새 10년이 다 되어간다. 집집마다 할머니 손길이 안 간 곳이 없다. 손자녀가 여덟인데 만나면 다들 할머니와의 추억을 꺼내고 그리워한다. 그만큼 할머니는 우리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할머니 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게 있다. 1918년 생이셨는데 백 년을 사셨다. 장수 유전자. 삼시 세 끼를 빼놓지 않고 드셨지만, 저녁 식사 이후에는 일체 간식을 드시지 않으셨다. 올바른 식습관. 그래서인지 속병이 없으셨다. 큰집에 가면 할머니가 고쟁이 주머니에서 접힌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손에 쥐어 주시던 기억도 난다.
이제는 반백의 나이가 된 시점에서 무엇보다 할머니를 존경하는 점이 있다. 남에 대해서 험담하는 걸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다는 것. 할머니는 신기하리만큼 착한 사람이었다. 돌이켜 보면 안 좋은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나 상황을 만나면 자리를 피하셨고 말은 아끼셨다.
예전에 큰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할머니 일화가 하나 있다. 내게는 할머니의 미담으로 남아 있다. 할머니는 전북 남원시 보절면에서 태어나 윗마을인 장수군 산서면으로 시집가서 살았다. 큰 아버지가 어릴 적만 해도 마을에서 형편이 괜찮았던 것 같다.
그러다 남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빨치산이 인근에 자주 출몰했단다. 실제 장수군 산서면은 지리산, 회문산, 덕유산을 근거로 활동하던 빨치산의 이동경로였다고 한다. 마을 이장을 했던 할아버지는 대낮에는 식구들 괜찮은지 살피고, 밤에는 빨치산을 피해 면소재지 경찰지서로 피신하는 생활을 했다.
하루는 어두운 밤에 개가 짖기 시작했다. 마을에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는 신호다. 개 짖는 소리가 처음에 크다가 적어지면 다른 집으로 들어간 것인데, 그날은 개가 계속 짖었다고 한다. 개 짖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사립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빨치산 산사람 여럿이 집을 찾아왔다.
할머니는 네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불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호롱불을 켜서 할머니가 문 밖으로 나오니 빨치산들은 사정을 다 알면서도 이 집주인 어디 갔느냐고 물었고, 할머니는 저녁 먹고 나갔다고 답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산사람들이 할머니를 집 뒤편 대나무 숲으로 데려갔다. 이불속 아이들은 혹여나 총소리가 날까 봐 걱정하며 숨죽이고 있었다. 빨치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장전해서 할머니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했는데, 그중 한 명이 "잠시"라고 외쳤단다. 할머니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떼보라는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집에서 밥도 해 주고 그 사람이 잘못했을 때 편도 들어주고 그러셨단다. 빨치산이 된 떼보라는 사내가 "이 할머니 착한 사람이니 쏘면 안 된다."라고 얘기했고, 그렇게 그날 밤 빨치산들은 해코지 없이 집을 떠났다. 그밤 화를 면했지만, 시국이 너무 위험했기에 이후 할아버지 가족은 전주로 임시 피신했다.
그 일이 할머니 30대 초반 때다. 그때도 할머니는 박하지 않은 착한 사람이었다. 주변에도 잘하셨던 것 같다. 이후 전쟁이 격화되고 우리 집안은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냥 살았으면 전라도 사람이 되었을 지 모르지만, 6.25 전쟁으로 이주를 해서 부산 사람이 된 것이다.
설에는 친척이 다같이 산서면에 있는 산소에 모였지만 이번 추석에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 집은 부모님이 결혼 50주년을 맞이해서 산소 대신 원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벌초는 장수군 산서면 어르신이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을 대신해 주신다. 부모님과는 10월이나 11월 주말 하루 날을 잡아 산소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이번 명절 할머니를 떠올린다.
p. s. 할아버지는 생전에 돌아가셔서 얼굴을 모른다. 그때 할아버지가 가셨던 곳이 장수 호룡보루 근처는 아니었을까.
장수 호룡보루(長水 虎龍堡壘)
장수 호룡보루는 등록문화재 제190호로, 전북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186번지에 위치한다. 호룡보루의 높이는 7.8m, 하단 둘레가 16.5m이며, 하단부의 지름은 2.5m, 벽체의 두께는 1m이다. 벽체 중간중간에 총구를 내었고, 각각 4개의 총구가 상중하단에 엇갈리도록 설치하여 사방을 감시하며 사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호룡보루는 '호랑이와 용같이 용맹하게 싸우다'는 뜻으로 출입구 전면 윗돌에 새겨놓았다.
호룡보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9년 무렵 세워졌다. 빨치산은 식량의 보급과 세 확장을 위해 밤마다 마을로 내려오거나 경찰지서를 습격했다. 빨치산 부대가 산서면 인근 지역까지 출몰하여 경찰지서를 불태우고, 인명을 살상하자 당시 임준희 산서면장과 이장준 산서지서장이 주축이 되어 산서면 소재지 등 동, 서 양측에 2개에 사수대인 호룡보루를 만들어 빨치산 공격에 대비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동란이 발생하여 전세는 급변하고 공산치하에 처하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에 의하여 그해 9월 28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은 되었으나 지리산을 거점으로 패잔병들의 침략은 그치지 않고 밤에는 빨치산의 침략으로 극한 상황 속에 호룡보루를 사수대로 삼고 경찰과 향토 방위대가 생명을 던지는 필사적인 전투를 했다. 그 결과 승리는 하였으나 경찰관 4명과 수복대원 11명이 꽃다운 청춘으로 산화하고 그중에 이상용(25세) 대원은 빨치산의 급습으로 호룡보루 안에서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