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은 러시아 극동 해안에 위치한 섬이다. 남북 길이가 950km에 최대 폭 160km로 기다랗다. 러일전쟁(1905년) 이후 일본이 북위 50도 이남을 40년 간 통치했고, 이후 소련에 편입되어 현재 러시아 영토다. 일제강점기 한인 강제 징용과 관련된 아픔이 서린 섬이다. 주 도시는 남부에 위치한 유즈노사할린스크. 2025년 기준 인구는 45만 7000명이며, 한인은 2만 6000여 명이 산다. 전체 인구의 5.7%. 러시아에는 100개가 넘는 민족이 산다는데, 사할린에 사는 한인은 러시아인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다.
지난 26일 러시아 사할린으로 출장을 떠났다. 사할린동포 2·3세 30여 명이 한국에 사는 영주귀국 부모와 조부모를 방문할 수 있도록 인솔하기 위해서였다. 사할린과는 조금 인연이 있다. 외할아버지의 형님인 외종조부가 일제강점기 사할린에 가서 돌아오지 못했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충북 음성과 제천으로 영주귀국하는 사할린동포를 맞이하는 일을 했었다. 2010년 현지 인솔자로서 사할린을 첫 방문했다. 그러니 이번이 15년 만의 재방문이었다.
편한 출장길이 아니었다. 15년 전에는 사할린과 국내를 잇는 직항 항공편이 있었다. 3시간 정도 비행하면 사할린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터지고, 이후 러시아가 전쟁에 돌입하면서 직항은 끊어졌다. 경유해서 가야만 했다. 인솔단은 중국 북경을 거쳐 다시 국제선을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입국한 뒤 다시 국내선을 갈아타고 사할린으로 이동했다. 중간 대기가 많았다. 26일 오전 8시에 청주 집에서 출발했는데, 사할린에 도착하니 27일 현지시간 오후 1시(한국시간 오전 11시)였다. 총 27시간이 걸렸다.
숙소인 사할린 삿포르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주변에서 식사하고 간단히 회의하고 쉬면서 여독을 풀었다. 호텔 방 와이파이는 연결되지 않았다. 러시아가 드론 공격 등 보안 우려로 2025년 10월 이후 와이파이와 모바일 데이터 차단을 강화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잘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고, 메일로도 사무실에 있는 직원과 소통하며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통신이 터지지 않으니 답답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3일 차 아침, 사할린에는 눈이 내렸다. 10월에 보는 첫눈이었다.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한인회가 있는 한인문화센터를 방문했다. 택시에서 내려 건물을 보니, 15년 전 출장 왔을 때 이 건물 2층에서 묵었던 게 기억났다. 반가웠다. 한인회가 있는 2층에 올라가는데 불이 꺼져 깜깜했다. 출근을 안 하셨나 했더니 사무실에 박경춘 이산가족협회회장님이 계셨다. 알고 보니 사할린 전역에 정전이 된 상태였다. 호텔에서 불이 나갔다가 금세 들어온 걸 봤는데, 호텔은 비상발전기가 돌아가서 괜찮았던 것이다. 주 전체에 전기가 나갔다.
컴퓨터로 명찰을 출력해 만드는 작업을 추가로 하려 했는데 전기가 나가서 컴퓨터를 쓸 수 없었다. 다행히 전화는 가능했다. 박경춘 이산가족협회회장님은 조선학교와 러시아학교를 졸업하고 현지 탄광에서 오랜 직장생활을 하셔서 양 쪽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분이다. 한국에서 이미 개별 안내를 했지만, 몇 명은 전화번호가 틀려서 한인회를 통해 확인해야 했다. 박경춘 회장님을 통해 한 명씩 다시 연락을 해서 집결장소와 시간을 안내했다. 한 분은 병원 검진결과 암이 확진되어 못 가게 되었다. 최종에서 제외됐다.
전기가 나가니 주변 식당도 문을 닫았다. 박순옥 한인회장님과 부군께서 오셔서 일을 보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를 메가팰리스 호텔 식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연락해 봤는데 문을 연 식당은 이곳밖에 없다고 하셨다. 여기서 맛있는 보르시와 요리들을 먹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동유럽에서 널리 해먹는 국민음식이란다. 보르시는 감자와 당근, 양파, 사탕무, 비트 등을 썰어 양갈비와 함께 푹 고운 수프다. 느끼한 맛을 잡기 위해 스메타나를 곁들이면 분홍색 뽀얀 국물로 변한다. 우리의 쇠고기뭇국과 흡사하다고 하는데, 숟가락이 자꾸 가는 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한인회에 돌아왔다. 오후 3시쯤, 전기가 들어왔다. 작업이 시작됐다. 인솔단 셋과 여행사 부장님은 명찰을 추가로 출력하고 끼우는 작업을 같이 했다. 작업하면서 박경춘 회장님이 들려주시는 사할린 이야기를 들었다. 2010년 제천 영주귀국 대상자이셨다고 했다. 그때 입국했다면 나와 함께 이동하셨을 텐데, 출발 며칠 앞두고 남편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못하셨다고 하셨다. 남편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감정이 북받치시는지 울컥하시고 눈물이 살짝 차오르는 걸 느꼈다. 작업은 저녁 7시가 넘어서 끝이 났다.
한국에서 새벽 5시 대에 일어나는 습관 탓인지 현지에서는 7시만 되면 눈이 떠졌다. 몸시계가 정확하다. 출국 날이라 짐을 정리하고 조식을 먹고 길 건너편 레닌광장에 갔다. 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유즈노사할린스크역 앞에 세운 동상과 공원이다. 가까이서 보니 동상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동상 뒤로 조금 걸어 내려가니 돌로 만든 기념물이 하나 더 보였다. 1995년 5월 28일 사할린 섬 북쪽 네프테고르스크에서 발생한 규모 7.1~7.6의 큰 지진으로 2,000여 명이 사망했는데, 이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물이었다.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짐을 정리하고 일행과 한인문화센터를 다시 찾았다. 1층 한국관에서 돌솥비빔밥으로 식사를 하고, 2층에 올라가 어른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이날 한인회에서는 현지 방송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치 담그는 모습을 현지 방송국이 촬영하는 날이었다.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사할린에서는 10월이면 집집마다 김장이 다 끝난다. 박순옥 한인회장님이 한국인이라면 김치 담그는 법을 다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타국에서 한국적인 것을 더 지키려 더 노력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찾고 3시 30분 사할린 공항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멀리 눈 덮인 산을 보았다. 4시에 공항에 도착해 흰 색 구호조끼를 입었다. 우리를 보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떠나는 사람과 배웅할 가족들이다. 가는 편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다시 중국 상해로 가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여정. 러시아는 정말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조금 일찍 수속창구를 열어줄 법도 한데, 1분도 허락지 않는 분위기다.
일시방문 때도 사할린동포가 최대 1달간 머무를 옷이나 선물을 가져가기 때문에 양이 많다. 경유지에서 찾을 필요 없이 인천까지 스루보딩이 되면 몸만 움직이기 더 좋다. 인천까지는 안 되고 상해까지만 가능했다. 지난번에는 휠체어를 타야 하는 어르신이 여러 명 있어 직원들이 짐도 찾아드리고 이동보조 역할도 하느라 굉장히 수고했다고 들었다. 다행히도 이번 모국방문에는 거동불편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중간중간 사소한 일들은 있었다. 티켓 한쪽을 잃어버린다든지 한다든지 하는 문제 말이다. 이동 시 단체 식사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중국 상해공항에 착륙하니 새벽 1시 30분(한국시간 2시 30분)이었다. 출국 수속을 밟는데 이민국 직원이 내 구호조끼를 보더니 혹시 종교문제로 입국한 거 아니냐고 자꾸 추궁했다. 적십자가 종교단체 십자가처럼 보이나. 적십자는 만국 공통이라고요. 칸막이된 공간으로 따로 부르더니 휴대폰을 내놓으라고 해서 보여줬다. 사진을 훑어봤지만,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으니 보내주었다. 헤어질 때는 나와 악수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통과했는데, 인솔단인 내가 제일 늦게 통과했다.
공항 내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2시 30분은 되어서야 각자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침 전체 알람은 5시 30분, 조식은 6시, 입국수속은 6시 30분에 하기로 했다. 온전히 잠잘 수 있는 시간은 채 3시간도 되지 않는다. 씻고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고, 깊게 잠들어서도 아니 되었다. 5시에 일어나 씻고 5시 45분에 식당에 갔더니 다들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래층에서 다 같이 모여 입국수속을 밟으러 갔다. 짐을 보내고 티켓을 받고 들어갔는데 한 분이 티켓을 못 받아 시간이 조금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여객기에 모두 탑승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두어 시간 비행을 해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모두 무사히 왔다. 짐을 찾아 입국장을 나서니 재외동포청 직원과 본사 직원, 기자들이 나와 있었다. 입국을 축하하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국방문자들은 여기서 다시 지역별로 흩어진다. 가까운 인천, 서울, 안산 고향마을로 가는 사람, 남양주나 화성으로 가는 사람. 진짜 멀리 정관이나 양산으로 가는 사람. 정관이나 양산은 인천에서 차량으로 5시간 더 이동해야 하는 거리다.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이동해서 가족을 만나는 일은 몇 년 만에 한 번 이루어지는 험난한 여정이다. 아픈 사람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다들 보내드리고 인솔단도 해산했다. 나도 휴대폰을 켜서 아내랑 통화하고 가족 단톡방에 부모님께 출장 잘 다녀왔다고 보고했다. 짧고 빡센 출장을 다녀왔더니 몸무게는 빠졌고, 몸은 으슬으슬 추워지고, 입안은 다 터지고, 피곤에 폭 절었다. 그래도 일도 완수하고 배움도 컸던 출장이었다. 귀국 날 오후가 되니 집에 도착한 사할린동포 기사가 하나씩 올라왔다. 이산가족 상봉하셨나보다. 부모님이 해 주는 따뜻한 밥 먹고 도란도란 얘기하며 추억 쌓는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10301746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