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나님의 10문 10답
01 이 나라는 나의 두 번째 파견지다.
02 여기서 나의 밥친구는 Doble B와 한국인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카르멘이고, 주로 그날그날 있는 것 혹은 독일 가정식을 먹는다.
03 어제 점심에 나는 울산에서 김밥 떡볶이 순대를 먹었다.
04 같이 밥을 먹은 사람은 남편이다.
05 밥을 먹으며 주로 지금 주어진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어떻게 더 즐겁게 놀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06 나는 그 이야기를 하며 즐겁지만 붕 떠 있는 감정을 느꼈다.
07 요즘 내가 제일 자주 하는 혼잣말은 일하기 싫다, 발령받기 싫다이다.
08 최근에 나를 즐겁게 하는 건 재택근무/플라워 레슨이고, 가장 기분이 안 좋았던 건 파트너 기관의 갑질때문이다.
09 코로나19는 나에게 이렇게 단답형으로 표현할 수 없다.
10 내년 이맘때 나는 한국에서 사회복지사로 돌아가 일을 하고있을 것이다.
파라과이에 오기 전엔 어떤 나라에서 파견 생활을 하셨나요?
봉사단원으로 칠레에서 첫 파견 생활을 시작했어요. 사실 중남미 지역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우연히 첫 파견지가 칠레로 정해지면서 중남미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아요. 심지어 처음엔 스페인어를 전혀 못했는데, 칠레에서 1년, 파라과이에서 5년을 보내다 보니 이제는 무리 없이 스페인어로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현재는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잠시 들어와 계신다고 들었어요.
7월에 귀국했어요. 원래는 좀 더 일찍 4월에 들어오려고 했는데, 담당하던 사업을 코로나 긴급구호 활동으로 변경하는 업무를 마무리해야 했고, 같이 살던 멍멍이를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느라 7월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결국 멍멍이는 한국에 데려오지 못하고 다른 한국인 가정에 입양시키고 왔습니다. 흑흑.
출국할 때 마음이 무거우셨을 것 같아요. 현지 분들과 작별인사를 할 시간은 있었나요?
출국 당시에 모두 재택근무 기간이었던 터라 동료들과 얼굴 보고 인사를 하지 못했어요. 회사도 교회도 문을 닫았던 시기라, 현지 직원분들은 물론 교회에서 알고 지냈던 분들과도 충분히 작별인사를 못하고 나온 게 안타까워요. 다시 올 수도 있으니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왔는데 아마도 다시 돌아가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원래 파견 임기가 올해 말 종료될 예정이기도 하고, 지금 중남미 코로나 상황을 생각하면 임시 귀국 상태에서 파라과이 생활을 정리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파라과이의 밥 친구들은 어떤 분들이신지 소개해주세요.
모두 함께 일하는 분들입니다. Doble B는 제 상사분이시고, 카르멘은 제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의 핵심 인력이세요. 카르멘은 다른 스페인어권 국가 출신으로, 함께 외국인으로서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공유하면서 가까워졌어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이야기하며 같이 마음 아파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제가 ‘자봉이들’이라고 부르는 한국인 봉사단원 친구들도 저희 밥친구였어요.
파라과이에서 독일 가정식을 드신다고 해서 흥미로웠어요.
파라과이에 독일 이민자들이 많아서 독일식 음식을 파는 곳들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저희가 자주 가는 곳은 사무실 근처에 있는 독일 가정식 식당인데요, 독일 할머니께서 음식을 직접 하신답니다. 뷔페처럼 다양한 음식이 놓여있어서 먹고 싶은 것을 덜어서 먹는 식이에요. 주로 매쉬포테이토, 해쉬브라운 같은 감자 요리가 많은 편이고, 오일 파스타, 구운 야채, 커틀렛 같은 것들이 있어요.
현지 음식은 어떤 것이 있는지도 궁금해요.
고기가 싼 반면 채소는 비싸고 종류도 많지 않아서, 고기 위주의 식사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사도’라는 음식이 있는데요, 아사르(Asar)가 ‘굽다’라는 뜻이거든요. 이름처럼 석쇠에 고기를 올려 천천히 오랫동안(8시간 정도) 구워 먹는 음식이에요. 아침 9시에 고기를 올려놓고, 12시쯤 사람들이 모여 술을 한잔씩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3~4시쯤에 고기가 익으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는 거죠. ‘유카’도 파라과이 주식인데, 만디오카라고 불리는 고구마와 같은 구황작물이에요. 아사도를 먹을 때 유카도 석쇠에 올려서 함께 구워 먹거나 삶아서 고기에 곁들여 먹곤 합니다.
술 문화는 어떤가요? 칠레에 계셨을 때는 와인을 많이 드셨을 것 같은데, 파라과이는 어땠나요?
파라과이도 아르헨티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싸고 맛있는 와인이 많았어요. 집에 와인이 떨어질 날이 없었답니다(웃음). 와인 외에 다른 술도 가격이 저렴하고 다양해서, 가볍게 맥주 한잔 하기 좋았고요. 문화적으로 근무할 때 가볍게 술을 마셔도 되는 분위기라, 가끔 점심을 먹으며 생맥주를 한 잔 하기도 했어요.
최근에 울산에 다녀오셨다고요. 어떤 이유로 다녀오셨나요?
파라과이에 있으면서 ‘한국 돌아가면 여기 가봐야지’ 하면서 가보고 싶은 국내 여행지를 틈틈이 저장해뒀었어요. 예상치 않게 가지게 된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해서, 짬 날 때마다 남편이나 친구들과 리스트업 해둔 곳들을 다녀보고 있어요. 울산에서 태화강 십리대밭 길을 보러 갔는데, 은하수처럼 반짝반짝하게 꾸며놓은 곳이 너무 예뻤어요.
한국에서의 밥친구는 남편분이셨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긴 파견 생활 중에 장거리 연애를 해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니면 혹시 현지에서 만나신 건지도 궁금합니다(흐흐).
현지에서 만난 건 아니고요(웃음). 원래 알던 사이였는데 파견 생활을 하던 중에 어떻게 사귀게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네요(웃음). 사실 코로나로 결혼식이 취소되긴 했지만요. 남편이 저와 함께 지내려고 올해 초에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파라과이에 왔는데, 남편이 온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록다운이 시작됐어요. 4월까지 파라과이에서 집에만 있다가 남편이 먼저 전세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왔고, 저는 업무를 마무리하고 7월에 돌아왔어요.
일시 귀국 상태인 요즘 일과는 어떤가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계속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데요, 파라과이 시간에 맞춰서 밤 9시부터 업무를 시작해요. 시차가 13시간이나 되다 보니, 이메일로 소통을 하면 간단한 것도 처리하는데 며칠씩 걸리게 되더라고요. 낮에는 개인적으로 할 일을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고, 밤에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일을 끝내고 시계를 보면 새벽 세시가 넘어있곤 해요. 코로나로 인한 일시 귀국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오랜만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지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정말 소중할 것 같아요. 반면에 요즘 자주 하는 혼잣말이 ‘일하기 싫다, 발령받기 싫다’ 이시라고요.
지금은 일시 귀국해있긴 하지만, 파견 임기는 12월로 종료되기 때문에 그다음엔 어떤 업무를 하게 될지 아직은 모르는 상태예요. 파견 생활을 하면서 ‘내가 국제개발에 맞지 않은가?’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거든요. 현장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과정에서 조금 지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럼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어떤 일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고 있어요. 혹시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 일에서 동기부여가 되지 않고 에너지를 못 얻으면 어떡하나 싶은 두려운 감정도 있고요. 5년 가까이 현장에서 일했는데, 이제 새로운 근무환경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설레기도 하지만 두렵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해요.
파트너 기관과 일하는 게 항상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떤 부분이 어려우셨나요?
기금을 받는 입장에서 도너의 지침은 정말 성경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잖아요(웃음). 그래서 항상 지침을 꼼꼼히 읽고 그에 따른 보고와 증빙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가끔은 이들의 요구가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지침에 없는 내용, 혹은 원래 도너 측 담당자가 해야 할 일을 당연하단 듯이 사업 수행기관에게 요청하는 하는 경우가 있어요. 최근에도 그런 경우가 있어서, 어떤 지침에 근거해서 자료를 요청하시냐 되물었던 적이 있었어요.
코로나19는 ‘이렇게 단답형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답변에서 복잡한 마음이 느껴졌어요. 코로나19는 이나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개인적으로는 우선 결혼식이 미뤄졌어요. 파라과이가 록다운된 상황에서 한국에 들어올 수 없어서 결혼식 날짜를 미뤘는데,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결혼식 업체가 폐업을 해버린 거예요(흑흑). 웨딩촬영을 하려고 했던 야외 공원이 폐쇄되기도 했고요.
업무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사실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는 상황이었죠. 1년 내내 휴교가 지속되면서, 맡고 있던 교육사업을 계획대로 진행할 수 없었고, 기존 사업 활동을 모두 긴급구호 활동으로 변경해야 했어요. 초기 대응은 단순 배분 중심이었던 터라, 계획한 사업을 못하는 현실이 답답하고 안타까웠어요. 또 제가 긴급구호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교육사업 담당자로서 제 역할의 한계도 많이 느꼈고요.
올해 파견 임기가 종료되는 만큼 다음 스텝에 대한 고민이 많으실 것 같아요. 현장에서 5년을 계셨는데, 국제개발이 아닌 국내 사회복지 업무를 생각하고 계시다고요.
앞에서도 살짝 말씀드렸지만, ‘이 일이 나와 안 맞나’하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왜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지치는 순간이 있잖아요. 한국이었으면 좀 더 쉽게 해결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현지에서 이해관계자들을 만나서 논의하고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정작 진짜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어요. 기관 내부에서도 사람들마다 목표나 동기가 모두 다른데, 이 각자 다른 목표를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우리가 선택해야 할 수단을 이해시키는 데에서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그 과정마저도 즐겁고, 이것도 국제개발현장활동가의 몫이며 역량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저도 지친 것 같아요. 지금은 언어 때문에 힘든 점도 없고, 정전과 단수는 조금 불편할 뿐 파견 생활을 하는데에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국내로 들어오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일을 일답게 하고 싶은 마음’인 것 같아요. 제가 일로써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크게 없지만,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 잘하고 싶고, 치열하게 하고 싶은데 해외 현장에서는 제 마음 같이 않을 때가 많았어요. 제 노력과는 별개로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에 저의 능력이 평가절하될 때도 있고요. 어쨌든 인사평가는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니까요.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 파견 생활이 길어지면서 일종의 박탈감 같은 것을 느꼈어요. 저의 20대를 잃어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20대 중후반에 나가서 30대 초반에 한국에 돌아오고 보니, 친구들이 20대 때에 즐기고 누렸던 많은 것들을 저는 해보지 못하고 그 시간이 지나버렸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또래 친구들이 훤히 꿰고 있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는 저는 모르고 있더라고요. 파견 생활이 너무 길었나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당분간은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파견 생활을 오랫동안 한 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일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에 5년을 있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기획한 사업을 통한 변화를 직접 보고 싶었어요. 내 손으로 사업을 잘 마무리하고 싶기도 했고요. 파견 첫 해엔 기존에 진행 중이던 사업을 파악하고 마무리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다음 해에는 제가 직접 신규 사업을 기획하고 제안서 작업을 했었거든요. 처음부터 제가 형성한 사업인 만큼 애착도 있어서, 파견 계약을 두 번 연장하다 보니 벌써 5년이 흘렀네요. 사실 처음에 칠레에 있으면서 ‘파견 생활 1년으로는 성과를 볼 수 없구나’하는 마음에 좀 더 오래 현장에 있어야겠다 생각했는데, 5년을 있어봐도 대단한 성과가 나지는 않더라고요(웃음). 숫자로 보이는 아웃풋의 변화는 있겠지만, 진짜 변화, 지역사회와 사람들의 실질적인 변화는 정말 많이 기다려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나님과의 대화에 어떤 문장을 덧붙여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썼다 지웠다를 몇번 씩 반복하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 <사람의 마음> 가사로 편집자의 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그를 포함한 우리 모두, 오늘밤 잘 잤으면 좋겠다.
이제 집에 가자
오늘 할 일은 다 했으니까
(중략)
집에 가자 나는 정말 지쳤으니까
어찌된 일인지 집으로 옮기는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무겁기 짝이 없지만 일단 집에 가자
사람의 마음이란 어렵고도 어렵구나
하지만 오늘 밤엔 잠을 자자 푹 자자
하지만 오늘 밤엔 잠을 자자 푹 자자